Ⅲ.천국의 비유

 

.천국의 비유

 

1. 씨뿌리는 비유

마가복음 43-9절『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 11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이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다. 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가? 『자기』가 바로 영을 죽이는 육의 옛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이탈되어, 이 세상에 갇힌 것이다. 성경은 에베소서 5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교회는 성도의 영을 말한다. 영이 이 세상의 물질인 흙에 갇히므로서 죽어버리고, 인간이 된 생명체는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자가 누구이며, 씨가 누구인지, ()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씨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며, 씨는 하나님 말씀이다. 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한다. 요한복음 15 1절에서『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하나님이 농부이며, 씨뿌리는 자다.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곳에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가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얻게하는 열매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창세기 3 22절에서 설명한다.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한다. 그래서 창세기 3 24절에서『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죄를 알게해 주시는 것이며, 죄인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율법 속에 생명과일(그리스도)을 감추어 놓으셨다. 생명과실을 먹어야만 하는데, 먹지 못하게 막으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을 흙속에 넣으셔서 인간이 되게 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지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포기하고 율법 속에 감추어진 생명나무의 과실(그리스도)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보낼 테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의를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씨는 약속의 씨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땅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땅은 흙이다. 사람의 근본은 흙이다. 창세기 3 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땅을 간다는 것(경작)은 씨를 뿌리기 위함이다. 사람의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으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 열매맺는 일이다.

창세기 3 17-19절에서『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식량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경작하여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적 생각이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영생의 열매를 모르는 것이다.『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영생의 먹을 것이다. 영생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땅(마음)을 갈라고 하신 것이다.

창세기 2 15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 밖의 세상에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에서 그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위해서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경작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는 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한 것이다. 영생하는 과일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밭의 비유에서 네가지 유형의 밭이 소개된다. 즉 네가지 유형의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 만 좋은 밭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에 떨어져서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 좋은 밭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은 땅을 갈아서 씨뿌리기 좋은 상태의 밭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사실과, 이 땅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마음의 밭을 경작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잘 이해하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이 생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 거룩한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좋은 밭으로 경작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경작하는 것이다. 죽는 것은 탐욕의 마음이 죽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리고 희생제사를 통해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땅을 경작하는 의미다.

네가지 마음 밭에서, 좋은 밭을 제외한 나머지 밭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밭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과 흑암에 갇힌 자라는 것과 생명과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좋은 밭이다. 그래서 좋은 밭에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탐욕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같이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부활하여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밭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좋은 밭이 된다.

 

2. 등경 위의 등불

마가복음 4 21-23절『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먼저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이 헬라어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잘못되었다. 다시 수정을 해보면『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상자 밑에나 침상 밑에 두려고 등잔불을 가져오느냐 등잔대 위에 두려고 가져오지 아니하느냐 감추어 둔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은밀히 간직한 것 중에서 널리 퍼지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헬라어 번역성경)

창세기 1장의 첫째날에서 일곱째 날까지 표현을 하면, , 궁창, (), 마오르, (바다), 짐승(사람), 안식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성소의 용어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연결하여 적용할 수 있다.

넷째 날, 마오르는 등잔대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일곱별(일곱교회의 사자)을 의미한다. 일곱별은 복음을 전하는 자(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 별과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9장은 맹인을 고쳐주신다. 절기로는 오순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6-7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일곱 봉인과 인을 치는 내용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나가 천국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교회의 성도가 임마누엘이 되면 교회 안에 빛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등잔불이 된다.

빛이 그 안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빛이 되는 자가 있고, 빛이 되지 않은 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아닌 자가 그 빛을 보고 모두가 빛이 되는 원리가 된다. 빛은 집안에서 먼저 비춰지고 그 다음에 밖으로 빛이 나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임마누엘이 되는 사람은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진다.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가 흑암에 싸여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어 진다. 이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기 이전에 집안을 먼저 비추는 자가 되고 그 다음에 온 세상에 빛이 발산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은 창세기 1 3절에서 말하는 빛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이 세상이 흑암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는 것이다. 원래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하나님이 흑암에 있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빛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도라고 말을 하면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빛을 비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는 흑암에 있었으므로 빛을 비출 수 없었다. 예수님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빛이 됩시다.』 또는『빛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데, 『빛이 되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빛이 되었는데, 빛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기도인 것이다. 새생명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빛이 된 것이다.

 

3. 자라나는 씨 비유

마가복음 426-29『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바실레이아  데우 (ἡ βασιλεα το θεο)로서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땅은 흙으로 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흙의 모양을 만드시고 영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성전)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옛성전(옛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성전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부활의 몸(새성전)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새성전을 얻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옛성전)이 죽고(파괴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새성전)으로 태어나는 것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새성전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면 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새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성도가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인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된다. 로마서 4 18-22절『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아브라함은 처음 믿을 때,『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놀라운 결단을 하지만,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우리가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자기 의지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만 주님의 명령에 분별된다.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다. 제물을 쪼개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 안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안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때 언약을 받는다. 언약을 받지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이게 99세까지다.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주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낳은 생명 이스마엘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과 하나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라는 것이다.『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말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예수믿으세요, 예수의 공로를 믿으세요 믿으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 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브람이 전쟁을 이기는 승리를 체험하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해도 안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베드로처럼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해도 베드로는 자기 확신 때문에『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믿는 자로 보여질 수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자였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말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아들의 말은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라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그 분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현재적으로 그 분과 부활로 연합하여 열매맺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30-32절『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했다. 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자기 밭은 바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렀을 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장면이 있다. 요한복음 4 22절에서『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자기 밭에 심은 자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기 밭(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겨자 씨)를 심었다. 그래서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되었다. 이 공중의 나는 새들이 바로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새들이다. 바로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처음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약해 보이지만,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의 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겨자씨(예수 그리스도)를 성도의 심령 속의 밭에 심어주신다. 겨자씨 비유에서 밭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331-32절에서는 하나님 나라 대신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천국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서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셨다. 성도 역시 부활의 열매가 맺혀지고, 성도가 전도를 통해서 그 부활의 열매를 나눠주므로서 확산되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은 이방인을 의미하지만, 현재적 부활이 되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 제자들이『우리는 왜 고치지 못합니까』라고 물렀더니『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는『날마다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육정이나 혈통으로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오직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기경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땅이 기경될 때 농부가 씨를 뿌려주는 것이다. 농부가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서 가꾸면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한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된다. 씨를 뿌리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것은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이 산)을 저리로 옮겨버린다. 그래서 저 산(새성전)을 저기서 여기로 옮겨버리라고 하면 옮겨지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권능은 병을 치료하고 죄를 사해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적 부활의 능력이 없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말을 했지만, 귀담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패역한 세다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인데,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궁금하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동안에는 제자들이 직접 권능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능력이 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 24-30절『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비교하면서 말하는데, 알곡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자들이고, 가라지는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자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에 대해서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 잘 하고, 교회에 봉사 잘 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성도의 심령 속에 두가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알곡(새성전)과 가라지(옛성전)이 있다는 말이다.

알곡은 밀이다. 그런데, 가라지는 밀과 비슷하지만 먹지 못하는 독초를 말한다. 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가라지는 추수때 불사르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하신 이유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30절에서 말한 내용을 13 36-43절에서 설명한다.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좋은 씨(하나님 말씀)를 뿌린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뿌린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피와 부활의 살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살을 먹는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세상에서의 구원을 예정하셨는데, 그 첫번째의 언약이 창세기 3 15절의 말씀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이 노아를 택하시고,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언약의 말씀을 계속 이어간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약속을 들어왔으며,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장차 이루어질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며, 성취의 약속을 받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은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 23-24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여기서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현재적 부활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좋은 씨로 말미암아 결실된 알곡(십자가의 죽음)이 천국의 아들들(부활)이 된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악한 자의 아들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나타낼 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 44절에서『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마귀 자식이라는 의미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죄인이라는 말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성도의 심령 속에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을 추수 때까지 그대로 주신다. 추수는 알곡을 거두고, 가라지는 불에 태우는 것이다(불세례) 불세례는 심판을 의미한다. 성도가 물세례(죄에 대해서 죽음)와 불세례(옛사람의 죽음)를 받으므로, 성령세례를 받고, 새성전(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불심판때 가라지를 거두어낸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어떤 신앙생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곡이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에는 옛성전이 있고, 새성전이 있다. 옛성전은 육체로부터 나타난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새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를 새사람이라고도 한다. 새성전이 세워지면, 이전에 나라고 생각한 옛성전은 이제 나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6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성전이 들어서도 옛성전이 바로 옆에 존재한다. 비록 나와 상관없는 것이지만, 계속 존재감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마치 알곡 옆에 있는 가라지가 알곡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내 심령 속의 가라지는 탐욕이 자리 잡고, 육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러나 알곡은 성령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로마서 85-8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6. 보화, 그물, 진주, 집주인 비유

마태복음 1344절『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천국을 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질문했을 때,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고, 어떤 사람에게는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비밀이 감추어진 대상에 대해서 마태복음 13 14-15절에서『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세리와 죄인들이 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된다.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자 중에서 사도바울 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빛 가운데서 만났다. 그리고 셋째 하늘에 직접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들었다.

그 비밀은 바로 사도행전 26 17-18절에서 말하는 내용들이다.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바울은 이 말은 에베소서 36절에서 다시 설명한다.『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11 25-26절에서도 이 비밀을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이 말은 이사야 49 6절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천하만민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보고 배우라는 뜻이다. 이방인을 구원받게 하는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정한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그래서 이 비밀을 시행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사도 베드로에게 사도행전 10 11-16절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특히 10 12-13절에서『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이방인에게 먼저 부활신앙인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여기서도 천국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천국이 보화와 같다고 했으므로 부활이 보화인 것이다. 그런데 보화가 밭에 감추어져 있다. 밭은 마음 밭이다. 밭은 헬라어로『아그로스』다. 경작된 땅과 경작되지 않은 땅이 있다. 경작된 밭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이고, 경작되지 않은 밭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여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성도가 율법 속에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너무 기쁜 것이다. 성도의 심령 옛성전이 있는데, 이를 팔아서(십자가에서 죽고), 보화(새성전)을 사는 것이다. 숨겨둔다는 말은 보화는 심령 깊은 곳에 세워지는 새성전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주도 마찬가지로 부활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을 얻을 수 있으므로, 진주로 비유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 중에서 좋은 물고기는 현재적 부활을 믿어, 심령 속에 새성전(새사람)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하고, 못된 물고기는 죽어야 할 옛성전을 의미한다. 그래서 좋은 물고기는 바구니에 담고, 못된 물고기는 버려버리는 것이다.

 

7. 잃은 양을 찾는 비유

누가복음 15 1-7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배경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인들인데, 메시야가 오면 당연히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를 하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는 숨겨진 뜻이 있다. 듣고 깨닫는 자만이 알게된다.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 11-13절에서 씨뿌리는 비유가 있다.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서 55 1절에서『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목마르고, 돈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5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이 가난한 것을 아는 자다. 영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영을 살리는 생명을 달라고 하면 주시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생명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부활)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주신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충만한 것을 나타낸다. 일백은 열의 열이다. 즉 더욱 더 충만(부활)하다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더 넓게는 천하만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을 염두에 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에서『잃다』라는 말의 원어는『죽다, 파괴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잔치를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이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15 32절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십자가)가 살아났으며(부활)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여기에서 잃었다는 말이 죽었다는 의미로 대체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 곧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부활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들어있다.『죽은 것과 잃은 것』의 의미는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떠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죽었으며,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것이 부활생명이다.

요한복음 9 39-4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부활생명)에 대해서 소경인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내용은『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하고,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세리나 죄인들이다. 보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게 한다는 것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바리새인들이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므로,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눈을 감겨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생명인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돌이킨다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를 생각하고 있지만, 회개의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며 그래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육체 속에 숨겨진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육의 탐욕은 자기라는 주체로 나타난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회개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이와같이 회개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떠난 양이다. 그런데,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양이 한 일은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양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이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순순히 목자를 따라 가는 것이다.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헐하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을 말한다. 목자를 떠난 양이 죄인이다. 양이 목자를 만나면, 돌아갈 수 있다.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시는데,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통하여, 누가복음 19 10절에서『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혼아홉 마리의 양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 자칭 의인이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한다. 오늘날 육적인 눈으로 부활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8.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누가복음 15 8-10)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두번째의 비유이다. 첫번째 비유는 백마리의 양 중 한마리를 잃어버려 그 목자가 한마리를 찾으로 나가는 비유이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으로 가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어느 여자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이야기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셔서 여자인 교회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죽어있는) 동전을 찾는 이야기다. 두번째 비유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만으로 영을 살리는 일이 가능하다. 이 두가지 비유의 마지막 귀절은 다 똑 같다.『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상태가 두번째의 비유에 이르런다.

인간의 영은 어두움 속에서 죽어있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부활)이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서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교회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마른 뼈들이 붙고 거기에 가죽이 붙고 힘줄이 붙고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성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난 것이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죽은 자가 영적으로 살아나고,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 25절에서『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모든 사람들이 죄와 허물로 영이 죽어있는데, 죽은 영이 사랑을 베푼다고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죄로 죽은 영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 베드로전서 2 5절에서『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노아는 의의 전파자였다.

우리의 목표는 의인(부활)이 되는 것이다. 의인이 되어야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게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로마서 1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막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의롭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가지가 부딪히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주님은 의인을 찾는다. 의인이 열명이라도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의인이 중요하다. 의가 사랑보다 먼저다. 의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은 먼저 공의를 구한다. 그 다음에 긍휼과 사랑이 뒤따른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말하는 실정이다. 의가 없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왜 회개하면 화해가 일어나는가? 주님이 의롭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는 노아를 의의 후사라고 했다. 즉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의롭기 때문에 방주를 허락하셔서 노아를 살게 하셨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는 아들 둘 다 부패했다는 말이다. 둘 다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선하게 보이는 자나 불의한 자나 둘 다 부패한 것이다. 탕자는 사랑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다. 사랑받고 있는 동안 아버지를 버린다. 예수님은『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 때라』라고 했다. 회개하는 자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음성을 들을 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이 말은 여자가 등불을 켜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것(회개: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에게 부활시켜주신다.

구원의 조건은 사도행전 20 21절에서『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앞의 두가지 비유에서는『죄인이 회개하면』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조건이 없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 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권세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부활)을 입히는 것이다. 이 옷은 돌아온 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락지를 끼워주는데, 이 가락지도 아들의 신분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에는 권리를 말하고 있다. 『네 발에 신을 벗어라』는 말이 있는데, 권리를 포기하라(십자가의 죽음)는 말이다. 신을 신는 것은 권리가 회복(부활)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

 

9.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 25-32절『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하게 된 이유는 누가복음 15 1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15 2절에서『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므로 예수님이 3-4절의 말씀을 하게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찾으면 이웃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여기에는 회개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 다음에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가 8-10절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찾았더니『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에도 회개가 언급된다.

회개가 무엇인가? 오늘날 회개의 의미가 repent에서 receive로 바뀐 것이다. 돌이키는 것에서 영접으로 바뀌었다. 위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비유이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주님이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두번째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드라크마는 죽어있다. 에베소서 2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 영으로는 죽어있다는 말이다.  22절에서『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허물과 죄로 죽은 이유가 바로 세상 풍속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죽어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주인은 마귀인 것이다. 에베소서 2 3절에는『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사랑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하므로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에서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자(십자가의 죽음)가 살아 돌아오는 자(부활한 자)를 사랑한다는 말씀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는 하늘의 부활생명을 가진 거듭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실로암 망대에서 망대가 갑자기 무너져서 그 곳을 지나가던 자가 열명이 넘게 죽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억울하게 죽는 자들이 많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실로암 망대 때문에 죽은 자들이 참 애석하다』고 말하니까『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저렇게 죽으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온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의(부활생명)가 있는 자이다. 따라서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가 필요한 것이다. 의가 없는 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다.

로마서 1 17-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리고 로마서 2 5절에는『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그의 아버지가 마귀이고 죄인들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에수님은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말씀을 한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여, 하나님의 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육신적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는 회개가 있는 자는 찾기가 쉽지않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극히 드물다는 말이다. 주님이 주인되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사는 거짓된 교인들이 득실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 만을 노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현재적 부활생명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흰옷인 의의 옷(부활)을 입지 않은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계시록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롯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롯의 처는 율법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를 상징한다. 복음(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듣고 가다가 율법(자기의 의)으로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말씀이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끝까지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회개를 외치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노아가 의의 도를 외치는 것 처럼, 의의 도를 외치는 자만이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활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다름 아닌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10.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 1-9절『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탕감해 주므로서 주인의 재산을 탕진했다. 그런데 주인이 이 불의한 청지기를 보고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들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빚을 탕감해주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18 23-35절에서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내용이 나온다. 어떤 관원이 왕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왕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하는데,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하니까, 왕이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 관원이 왕으로 부터 물러나서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아주 적은 돈) 빚을 진 사람을 발견하고는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으며,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하니까 그를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다른 관원이 왕께 이 사실을 고하니 왕이 분노하여 1만 달란트 빚진 관원을 옥에 가두고 빚을 다 갚기 까지는 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가지고『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번째의 인물은 "불의한 청지기인데, 불의한 청지기는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이 심어준 성전(옛사람: 첫사람 아담)이 있다. 이 성전을 관리하는 자가 바로 『나』라는 불의한 청지기이다. 옛사람인 불의한 청지기는 육의로 비롯된 모든 것을 관리한다. 옛사람의 모든 것을 관리하므로 부자라 생각한다.

누가복음 12 16-21절에서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농부가 소출이 많아져서 창고를 더 많이 지어, 양식을 가득 채우고 말하기를『이제 내가 양식이 충분하므로 내가 먹고 살아도 문제가 없겠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 비유를 통해서『어리섞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적 재산으로 비유하면, 이 땅에 사는 불의한 청지기들은 모든 재산이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그것을 불려서 재산을 증식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부자의 재산을 이용하여 자기의 재산을 불의하게 축적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등의 일이 있다고 누군가가 부자에게 고발을 했다. 남에게 빌려준 부자의 재산에 대해서 과도한 이자를 받고 그 중의 일부를 취하는 방법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축적했다. 주인이 이런 일을 알자 불의한 청지기와 거래를 끝내기 위해서 그 동안의 거래 사항에 대해서 결산을 하자고 했다.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되면 그 뒤에 할 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해서 묘수를 떠올렸는데,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나중에 잘 보이기 위해, 주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보고 부자가 칭찬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에게 빚진 자들의 채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이 옛사람의 것을 관리하고 주인 노룻을 해 왔는데, 이제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채무를 다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회개하는 죄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과 예수님이 하신 일과는 일맥상통한다.

그런데『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뜻이 있으며,『불의한 재물이 없어질 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불의한 재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탐욕이 숨어있는 육(옛사람)이다. 그런데,『불의한 재물로 친구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영원한 처소(천국)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엽합(친구)되어라는 말이다. 친구는 이 세상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불의한 재물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5 13-14절에서『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그래서 로마서 6 3-4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 14-15절에서『너희는 내가 명한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라고 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하면 된다. 명하신 것은 요한복음 15 12절의 내용이다.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 18-19절에서『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우리가 불의한 재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께 대한 빚진 자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면 이 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전하는 자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복음 15 26-27절에서『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우리가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권세를 주시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는 것이다. 전해야 하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11.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누가복음 18 1-8절『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에서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잠시 잠깐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며,우리 인생이 칠십이요 팔십이라도 일식간에 날라간라고도 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음 속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히브리서 9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심판을 대비하라는 말인데,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듯하다.『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

『불의한 재판관 앞에 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니, 이 말씀을『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하는 기도로』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히브리서 11 13-16절에서 말하고 있다.『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본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본향은『그 곳에 살았다』라는 말인데, 인간의 영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지만, 그런데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실을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향에 돌아가려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면서 레위기 25 23절에서『토지를 영영히 팔지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함께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가나안 땅에 대해서 나그네라 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왔으므로 애굽이 본향이 된다. 애굽이 고향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이 땅이 나그네라는 것이다.

위의 히브리서 11 13-16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자기들이『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라』고 증거했다. 즉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떠난 온『갈대아 우르』를 말하는 것이라면 돌아갈 기회라도 있지만 그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애굽도 아니다. 히브리서에는 더 좋은 본향은『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더 좋은』의미는 물질세계인 이 땅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인생의 모든 영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와서 잠깐 지내다가 돌아가야 할 나그네 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전도서 12 7절에 보면『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라고 했다. 육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주체는 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의 주체를 육으로 비롯된 마음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육으로 비롯된 마음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옛사람은 육으로 비롯되어 있으므로, 죽어야만 영이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말이다. 영은 육에 있으면 안되고, 영의 세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 속에 영이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갇혀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옥에 갇혔다』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이 에 세상에 오신 목적은『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기 위해서』라 했다.

요한복음 4 24절에서『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하나님은『영』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 나라에 있다. 인간에게도 영이 있다. 누가복음 8 55절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리므로 영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요한복음 6 63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영이 죽어있다』죽어있다 라는 말은『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라는 말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물질세계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을 만드셨는데, 왜 이 영이 하나님 나라에 있지 않고 물질세계, 흙인 육에 있는가? 즉 육체에 영이 갇혀있는 것이다. 영이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자유롭지만, 영이 흙속에 갇혀있으면 자유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영은 육이 죽으면 육체로 부터 나오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영이 육체로 부터 나오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유를 찾을 수 있는데, 육체로 비롯된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죽었던 영이 일어나, 부활인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의 마음은 육신으로 비롯된 마음과 다르다.『자기를 부인하야 한다』는 말은 이 육신으로 비롯된 옛사람을 부인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비롯된 옛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선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영을 흙 속에 넣어 주셔서 인간이 되었다. 영의 입장에서는 이 땅이 나그네라는 말이다. 흙 속에 넣었다는 말은『가두었다』라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12 4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을 하고 있다.『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낙원은 땅에 있는 인간으로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나 물질세계, 흙으로 된 인간 속에 있는 갇혀있는 영은 흑암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들어서 부르짖으라, 택하신 자의 원한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택하신 자들이 가진 원한은『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한 마음』이다. 과부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하고, 사탄은 검사의 역할을 하며, 예수님은 변호사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재판관 역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변호사 역할도 하고 재판관도 하므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불의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죄인이 변호사이시고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호사로서 죄인(과부)을 대속해 죽는 것이며, 재판관으로서 죽은 죄인(십자가의 죽음)을 살려서 의인(부활)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소원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복을 빌고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하나님 나라에 돌아가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과 함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 18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오늘날에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의 생명이 없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을 괴롭힌 과부는 하늘의 부활생명을 얻게 된다.

12. 바리새인과 새리 비유

누가복음 18 9-14절『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자기의 의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면,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다. 오직, 세리는『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의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께 범죄했다. 하나님은 영들을 어두운 곳에 가두어버렸다. 그곳이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흙속에 영을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날 때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처럼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첫사람 아담 이후 인간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율법을 주시고 자기의 의에 빠진 자들을 깨닫게 해 주셨다. 율법을 철저히 잘 지키면 의로운 자가 되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다가 자신들은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어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형태로 노력하여 자기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영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약속하셨다. 창세기 3 15절에서『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후손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여, 씨의 언약을 하시고, 할례를 하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서 8 3-4절에서『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겠다고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가신다. 세리에게 다가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되시는 것이다. 세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의를 이루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430년간 가두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애굽에 갇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갇힌 것과 같은 개념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임을 고백하고 부르짖고,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 23-24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스스로 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마다 돌아가게 된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모든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부활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마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 속에 빠져 있는 자인 것이다.

 

13.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 11-27절『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와 흡사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다. 교회 사람들은 전도를 잘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내리신다 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으며, 다시 재림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 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율법을 이루셨는데, 세상에 남겨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인 부활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을 떡으로 표현했다. 요한복음 6 48-51절에서『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부활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달란트(헬라어)는 히브리어로『키카르』라고 하는데, 성소의 진설병의 하나였다. 즉 율법을 나타낸다. 신명기 18 22절에서『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장래 하나님이 세우는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신 일이 증험도 있고 성취함도 있는지를 보는 것이 바로 달란트 비유와 므나의 비유인 것이다.

『장사하다』라는 헬라어로『엘가죠마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 다음날 또 유대인들이 찾아왔다. 예수님이『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일을 한다』는 것이『엘가죠마이』다.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경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경작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을 한다. 영적으로는 마음 밭을 갈아서 하나님의 부활 생명의 말씀을 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열매가 하늘의 생명이다.『엘가죠마이』라는『일을 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즉 『장사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달란트로 장사했다는 말은 앞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 생명의 떡(부활)을 통해서 영생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다섯은 율법을 말한다. 다섯 달란트(율법)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그래서 열 달란트가 되었다. 열 달란트는 율법의 완성을 의미한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떡(부활)과 포도주(죄의 용서)를 남겨신 것이다. 달라트 비유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부활생명을 얻는 자들이다. 두 달란트는 산 떡(부활)이 두개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개의 달란트를 벌었다. 산떡 두개(부활)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부활을 전해서 하늘의 생명이 열리도록 한 것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떡 하나를 받아서 땅에 묻었다. 누구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것은 현재적 부활아 아니라, 육체가 죽고(땅에 묻히고) 난 뒤에 부활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23 13-15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땅에 묻었다는 것은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은 믿지만 현재적 부활은 믿지 않는 반쪽 복음을 들고 있는 자이다. 육체가 죽어서 언젠가 이루어질 부활을 믿으므로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므나의 비유도 달란트와 거의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므나의 비유는 므나(산떡:부활)를 열 사람에게 주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리고『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한다. 열이라는 말은 온 세상을 말한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말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하는『엘가죠마이』와 다르다. 헬라어『프라그마 듀오마이』라는 말로서 이 말은『프라스오』에서 온 말이다. 『행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 10절에서『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그 몸으로 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의(부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피를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살을 먹는 것)이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의로운 부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이다. 므나로 장사하는 것은 부활생명을 나누어주는 자라는 말이다. 값없이 장사를 하는 것이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열 므나는 말씀이 완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의 살과 피로 의로운 자(부활 생명)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고을은 성읍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은 참 성전(새 예루살렘 성)의 그림자다. 열 고을은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를 말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의 새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이다.  

다섯 므나를 받은 사람도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므나를 남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이『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다섯이라는 말은 수확을 해야할 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감추었다』는 것은 육체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수건 속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므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늘의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여기서 은행(헬라어:트라페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테이블』()이라는 말이다. 진설병 상(떡상:부활)을 말한다. 히브리서 9 2절에서『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출애굽기 25 30절에서도『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예수 그리스도라는 산떡(부활생명)을 왜 떡 상에 올리지 않았는냐 라는 것이다. 떡 상에 올려 놓으면 누구라도 먹고, 부활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떡을 먹게 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자)하게 된다는 것이다. 떡을 감추어 둔 자의 죄는 큰 것이다. 감춘 자는 육체가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로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이다.

 

14.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 19-31절『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 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부자를 말할 때, 세상의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3 17절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옳다 하고, 높힘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한다. 호화롭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에는『깨끗하다(죄가 없다), 열락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항상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으므로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죄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즐거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지는 가난의 대명사다. 가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났으므로 이것을 깨달을 때 영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지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자라는 것이다.『나사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나자로스인데, 히브리어는 엘 아사르라 부른다. 엘은 하나님이고, 아사르는 도움을 얻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의미다.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 6-7절에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아브라함의 믿음은 100세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것이며, 장차 그리스도를 바라는 믿음이 된다.

히브리서 11 17-19절에서『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난 것이 탕자다. 회개는 죽은 자같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즉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들이라고 고백하며 긍휼을 구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자체가 죄의 상태에 묶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죄를 깨닫고 긍휼을 구할 때, 하늘의 복을 주신다. 바로 부활 생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부활생명인 이삭을 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 사람들에게 좋아할만한 칭찬을 받았다. 누가복음 16 15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그래서 부자는 음부에 가는 것이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고난은『나쁜, 사악한, 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사로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설 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눈먼자, 손마른자, 문둥문둥병자 고쳐주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믿음은 백부장이 같은 믿음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부자가 음부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했다. 나사로를 살려서 세상에 나가면, 형제들이 회개할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그리스도의 약속)을 들으면 된다고 했다. 부자가 율법 속에 담겨져 있는 것(그리스도)을 깨닫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하나가 된다. 율법 속에 복음이 있는 것이다. 복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15. 좁은 문 비유

누가복음 13 23-27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장 이전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이 소개된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도『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이렿게 묻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믿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는 믿음은 나의 죽음과 결부되지 못한다.『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그 문이 좁고 협착해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찾는 자도 적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만 이 문을 찾게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좁고 어렵기 때문에 이 문을 싫어한다.

문이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평생 예배한다고 반드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이 쉽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다. 구원이 쉬워보이는 길은 멸망 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셔도, 사람들 스스로 회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이 문장 중『어디에서』라는 말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단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모르는 사람이 된다. 거듭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력과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형질이 바뀌는 것이다. 이는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은 하늘로부터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은 것처럼 없던 생명이 생겨야만 되는 것이다. 그 해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다. 그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비라는 말이다.『현재적 부활 생명으로 거듭나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도 구원받는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현재적인 부활을 믿는 것은 정말 좁은 길과 같이 여겨진다. 대부분 육채가 죽어서 부활된다고 믿기 때문에 정말 좁은 길이다. 육체를 바라보는 부활은 육적 자아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성령이 인도하는 자인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만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씨앗을 뿌려서 생명으로 꽃피우지 못하면 죽어있는 것이다.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죽어있는 생명과 같다. 마태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육적 자아의 생각을 믿지 않고, 영작 자아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거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믿을 것이다. 그어나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반쪽 복음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 된다. 믿음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다. 이게 부활생명이고,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길이다.

 

16. 새것과 옛것 비유

마태복음 1352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네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이고, 두 번째는 값진 진주의 비유이며, 셋째는 바다에 쳐진 그물 비유, 넷째는 좋은 집주인의 비유이며, 네번째 새것과 옛것의 비유이다.

새것은 새언약의 말씀이고, 옛것은 옛언약인 율법을 말한다. 율법과 새언약을 정확히 풀어서 해석할 수 있어야만 천국의 제자된 사기관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 너희는『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천국을 잘 배워, 말씀을 능숙하게 옛것과 새것을 꺼내어 풍성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하셨다. 성경 말씀을 읽고 남에게 전도하기 위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잘 적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새것과 옛것의 구분을 잘 못하고 있다. 이 말을 에베소서 5 18절에서 말한다.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여기서 술은 포도주를 말한다. 포도주는 하나님 말씀이다. 술에 취하면, 이말 했다가 저 말했다가 횡설수설하게 된다. 옛것과 새것의 구분도 할 줄 모른다면 이는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술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한다.

옛것은 율법으로서, 죄인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셨다. 그래서 이제는 옛것 대신에 새것을 내 와야만 한다. 새것은 새언약으로 하늘의 부활생명이다. 새언약은 피와 살로 설명한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피를 마시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 바로 살을 먹는 것이다. 살을 먹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다.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살을 먹지 않고 보관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살을 먹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불에 태워져 버린다.

고린도후서 5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것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5 21절에서『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믿음은 두가지가 있다. 부르심을 입은 믿음과 택하심을 받은 믿음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스스로 구원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으며, 또한 그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깨닫는 자의 믿음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새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구약에서는 히브리 백성이 광야에서 옛언약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거듭난 새사람이 새언약을 받게된다. 고린도후서 3 3절에서『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현재적으로 부활하여 거듭난 새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3 6절에서『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는 거듭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복(의의 옷:부활)을 준비하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3 14절에서『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수건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소의 휘장처럼 덮어서 죄인들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다. 곧 휘장이 찟겨진 것처럼, 에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휘장 안의 지성소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새언약에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새언약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을 알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새언약의 표를 받아야만 한다. 새언약의 표는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17. 열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 1-2절『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예수님이 본문의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연결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성경의 원문은 장과 절이 없지만, 16세기 경에 들어와서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장과 절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원문의 입장에서는 24장과 25장은 연결되어 있는 내용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25장에는 열처녀의 비유 뿐만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도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그 대상은 달란트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므나의 비유에서와 같이 열(10)이라는 숫자는『완성, 충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열처녀는 모든 처녀를 의미한다. 처녀는 고린도후서 11 2절에서『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그래서 처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 교회 신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 신부에게 주는 포도주를 마시는 자가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혼인 전통에서도 등장한다. 예비 신랑이 예비 신부 집에 방문해서, 포도주를 잔에 따르고 예비신부에게 주는데, 그녀가 마시지 않으면, 혼인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주는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해당한다. 즉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처녀는 모두가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고 있지만, 포도주를 마신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밖에 없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마태복음 7 25절에서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이 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슬기로운 열처녀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는 말씀이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미련한 자는 7 26절에서『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어리섞은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셨는데,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완전히 믿지 않은 자가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악에 대해서 대속의 죽음 통해 다 이루셨는데, 여전히 신자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하여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 역시 현재적으로 부활이 이루어지는데, 신자들이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은 자는 죄를 멀리한다. 로마서 6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을 가지고 있다. 요한1 5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사탄이 접근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옛사람이 죽은 자가 아닐 것이다. 또한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자는 여전히 율법에 갇혀 있는 자인 것이다.  

열처녀가 가지고 있는 등불에 대해서 잘 이해하여야만 한다. 등불에서 나오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부활생명)이다. 마태복음 514절에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그리고 마태복음 5 16절에서도『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착한 행실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서 착한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영을 깨우는 일(부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영광을 받는다.

요한복음 5 35절에서『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즉 요한은 빛(부활생명)을 받아서 그 빛(부활)을 비춘다는 의미다. 에베소서 5 8절에서『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부활)이라 빛(부활)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예수님이 성도에게 부활생명을 주고, 성도가 부활생명을 받았으므로, 부활생명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즉 부활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열처녀는 모두 등불을 가졌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다른 기름통을 가진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고 받아드린 자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처녀는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된다는 것을 믿으므로, 결국 어둠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 4절에서『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그릇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때 표현하기도 한다. 고린도후서 4 6-7절에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부활)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여기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라는 말씀은 창세기 1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보배는 그리스이시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인간을 의미한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게 부활생명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부활생명을 가질 수 있다.

기름은 감람유를 의미한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하는 감람유이다. 누가복음 4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성령이 임한 것을 기름부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1 2 20절에서『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 27절에서『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성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들어오신 것(성령세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허ㅏㄹ생명이 되는 것이다.

결국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믿는 부활생명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부활)이 되어 빛의 생명(부활)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자가 된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육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이다. 부활이 육체가 죽어서 이루오 지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로마서 8 1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이다.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허ㅏㄹ생명이 없는 자는 율법 아래 있으므로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옛사람이 죽지 않았으며, 성령이 없으며, 부활생명이 없으며, 미련한 다섯처녀에 해당하는 것이다.

 

18.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 1-14절『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에서 어떤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지칭한다. 교회는 바로 성도이며, 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신부 삼아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천하만민 중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만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인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게 부활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율법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갈라디아서 3 24절에서 말한다. 율법은 그 속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초청장인 것이다. 이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 보내지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초청장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다.

2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22장에서 혼인잔치 비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청함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온전히 통치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는 성령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땅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면 육적인 몸을 벗고, 영의 몸(부활)을 입어야 하는데, 그들의 눈으로는 영의 몸(부활)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육으로 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영의 몸이 의의 옷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몸을 말한다. 그들은 부활을 알고 믿지만, 현재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종들(선지자)을 보냈으나,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죽였다. 심지어 아들까지 죽였다. 이사야 49 6절에서 『그가 이르시되 네(그리스도)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그리스도)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부활을 위한 초청장을 보냈지만,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홀히 하여 알 수 없게 된 것이다.『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으로』의『자기』라는 말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자기가 주인 사람은 육체가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부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자기』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악(탐욕)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버리라고 말하는데, 비유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중시하므로,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다섯겨리(25마리)를 샀기 때문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부활보다 이 세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육체가 죽어서 부활함을 믿었기 때문에 현재적 부활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초청장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교회 안에서도 현재적 부활생명을 전하는 자를 모욕하고, 정신적 살인을 강행한다.

사도행전 13 4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부활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사도행전 28 28절에서도『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먼저 전해지는 것을 신비 라고 말한다. 로마서 11 25절에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로 갔다.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네거리는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경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서 권능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여기서 악한 자와 선한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을 발견하고 잔치 집에서 내 쫒았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예복은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이 혼인잔치 집에 준비되어 있는데,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인잔치 집을 채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옷(부활)을 입지 않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을 벗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의의 예복(부활)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육체가 죽어서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흙에 갇힌 자라는 말이다.

자기의 옷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는 자들이다. 자기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복은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옷을 벗고(예수와 함께 죽고), 준비된 예복(현재적 부활)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19.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2514-30절『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성경은 비유로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창세로 부터 감추어진 비밀이라 하고, 비유를 베풀어서 알려주신다고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비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서 내면에 숨겨진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말한다.『타국에 간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율법을 이루시고, 회개하는 자의 세상죄를 다 가져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타국에 가실 때 종들에게 맏겨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다.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이 분부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장사로 표현했다.『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라고 말하는데,『재능대로』는 인간의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로 두나미스(권능, 능력)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권능(병고치고, 각종 이적을 일으키는 것)을 따라 부활생명이 없는 것을 부활생명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금 다섯 달란트에서 헬라어 성경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없다. 달란트는 헬라어 달란톤(히브리어 키카르: 떡덩어리)에서 발전했다. 다섯 달란트는 둥근 떡이 다섯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섯이라는 말이며, 모세오경(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참형상이 아니고 그림자이다. 율법(약속)은 그림자이므로 참 형상은 바로 부활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101절에서『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다. 구약에 나오는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림자인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부활생명을 가진 자이다.

갈라디아서 324절에서는『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율법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라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달란트는 모세오경을 말하고, 이 모세오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달란트도 마찬가지로 떡 두덩어리이다.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 율법은 약속이요, 예언이다. 모세오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이 떡(히브리어:키카르)이라고 했다. 떡 두 덩어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예언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하나이다. 사도행전 1515-17절에서『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으면하늘 생명인 부활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예언과 성취함을 동시에 받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씀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합하면 일곱 달란트가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라고 말한다. 앞의 모든 것이 끝나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고 안식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 생명을 가진 자는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과 이루어진 말씀을 통하여 알려 주셨는데, 왜 모르는가? 그 이유는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도 땅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육체)은 혼돈하고 공허한 곳이다. 그들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을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장사를 해서 남긴 것이다.『장사를 한다는 것』은『영생하도록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일을 한다는 말은 땅을 경작한다(아바드)는 말이다. 씨를 뿌리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영생하도록 하는 일(엘가조마인)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요한복음 5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바로『장사를 했다』는 말이다.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게 했다는 말은 율법에 나타난 진실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생명의 떡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해서 부활생명을 얻게하면 장사를 잘 한 것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바로 달란트 즉 하나님의 일을 장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장사를 해서 남겼다는 것은 부활생명의 예수의 제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20.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33절『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과 염소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 스스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는 미혹된 것이다. 미혹되면 각기 제 길로 가게된다. 미혹된 양과 염소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므로 세상의 흙속에 갇힌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와서, 그들을 데려간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5 34절에서『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양들을 의미한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염소가 된다. 그런데, 양은 왜 의인을 나타내고, 염소는 죄인을 나타내는가? 양은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을 만났다고 말한다. 염소도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소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25 35-39절『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양들은 이렇게 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주릴 때 라는 말은 세상에 있는 자들을 영적으로 자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자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은 부활생명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에게 그 생명을 전한 것이다.『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라는 말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이다.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찾아서 부활생명을 주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래서 이제 그 일을 성도가 담당하는 것이다. 성도가 다른 신도들에게 부활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양은 영을 살리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일은 부활생명을 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7 21-22절에서『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평생 주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주님이『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 아들은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양이나 염소들은『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둘다 이렇게 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에게『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염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은 자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양은 영을 살리는 일을 했으며, 염소는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 쫒겨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영이 죽은 자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는 것이다. 사탄의 종이 된 자를 하나님 백성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던 영을 살려 주시는 분이시며,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체 속에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일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형제들이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동일하게 하시는 자가 된다. 그렇지 않는 자는 영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죽어 있던 영을 살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전해주는 것이다. 양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빛(부활)을 영이 죽어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했지만, 염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염소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부활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하늘의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양과 염소는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양은 하늘의 부활생명이 있으며, 염소는 하늘의 부활생명이 없다. 양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피를 마시고(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살을 먹는 자(함께 부활하는 자)이고, 염소는 율법에 가로 막혀 생명을 얻지 못한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소는 다른 사람의 영을 살릴 수도 없고, 자신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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