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종합)
하나님 나라
Ⅰ. 4대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천국, 하늘은 무엇인가?
1. 유사한 내용을 하나님
나라와 천국으로 다르게 표현한 부분
성경에 유사한 내용이면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으로 다르게 표현한다. 마태복음 11:11과 누가복음 7:28, 마태복음 13:11과 마가복음 4:11누가복음 8:10; (천국의 비밀/하나님 나라의 비밀), 마태복음 13:24과 마가복음
4:26(좋은 씨를 밭에 뿌린 것의 비유), 마태복음
13:31과 마가복음 4:30, 누가복음 13:18-19(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33과 누가복음 13:20-21(누룩비유); 마태복음 18:3과 마가복음 10:14, 누가복음 18:16(어린아이 비유); 마태복음 22:2과 누가복음 13:29(천국 혼인잔치 비유) 등. 각각의 구절에서 마태는 천국을 사용한 반면, 마가나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다.
이를 두고 많은 목사들은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성경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천국이라는 말로 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26회 등장한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면, 왜 하나님이라는 말을 이렇게 많이 사용했겠는가?
또는 많은 목사들은 마태복음에서 사용하는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시에
이 땅에 세우는 눈에 보이는 메시야 왕국을 의미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를 의미한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메시야 왕국을 말하는 사람들은 로마시대에 메시야
왕국을 연상하게 만든다. 메시야 왕국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우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 네번 등장하는데, 헬라어로“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로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왕국이라는 의미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 라는 말 대신에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싶으며,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와 임재하시므로, 성도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마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네 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므로 그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려
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보좌, 권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사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육적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초점을 맞추지만, 천국 또는 하늘(복수)은
성도의 심령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즉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개역개정에서 볼 때,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21번 등장하는데, 헬라어로 보면, 19곳에서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
등으로 사용되어, 천국(하늘왕국)이라고 표현했는데, 3곳에서는 테스 바실레이아스 로 표현되어 있어서
번역하면, 왕국이라는 것이다. 앞에 유앙헬리온(복음)이 있으므로 왕국 복음이라는 말이 된다. 왕국은 하나님 왕국인지, 하늘왕국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는 하늘왕국 복음으로 보여지는데, 그래서인지 왕국을 개역개정에서는 천국으로 번역했다.
천국으로 번역된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복수로서 히브리어로는
샤마임, 영어로는 heavens이다. 복수를 사용한 것은 사람들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천국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라는 보이는 사람의 개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임하며, 심령 속에 천국(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첫째, 마태복음에서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상 차이를
나타내는 성경 귀절이 한곳 있는데, 부자와 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태복음 19장 23-24절「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플루시오스)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플루시온)가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결국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살아있을 때 경험하는 천국이며, 하나님 왕국은 육체가 죽은 후에 최종적으로 가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을 할 수 있다.
둘째, 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것은
8곳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육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국은 왕이나, 신랑, 천국 문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마태복음 3장 1-2절「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메타노에이테)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엥기켄) 하였으니」
마태복음
4장 17절「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8장 11절「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앉으려니와」
마태복음
10장 7절「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이 가까이 왔다 하고」
마태복음
18장 23절「그러므로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2장 2절「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3장 13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5장 1절「그 때에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셋째,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 임하는
천국을 나타내는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19-20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헤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13장 11절「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태복음
13장 24절「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태복음 13장 31절「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태복음 13장 33절「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8장 1절「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태복음
18장 3-4절「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9장 1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넷째, 하나님 나라가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낸 것은 세군데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이 부분은 하나님 나라가
성도에게 임하여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1장 31절「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리라」이는 장차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21장 43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이도 장차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말한다.
마가, 누가, 요한은 천국이라는 말 대신에 하늘로 하나님 나라를 표현했는데, 하늘은
복수로 표현한 하늘, 단수로 표현한 하늘이 있는데, 복수로
표현한 하늘은 마태가 천국으로 표현한 톤 우라논과 같은 의미이다.
단수 하늘은 이 세상과 대비되는 영적인 의미에서 하늘을 사용하고
있는바 이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가 된다. 영적인 나라,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권능, 성령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 비유로 눈에 보이는 하늘을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 마태복음 23장 22절「또 하늘(호 우라노)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경을 통한 사례 비교)
마태복음
5장 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복음 6장 20절「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너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결국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이다.
영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이 육체에 갇힌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된다. 그래서 가난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천국이 되는 것이다. 심령은 영의 깊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천국은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서, 성령이 성도에게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권능인 하나님 나라가, 성도의 심령 속의 임하므로서 천국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성도가
살아있을 때 이런 경험을 하고 살게된다.
복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한다. 율법은 모든 인간들이 죄인임을
알려주신다. 그런데,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하늘의 복이 된다. 복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로마서 3장 19-20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이 알려주시는 것은『너희들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에서『가난하다』는
것은 땅이 없어서 먹고 살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지파별로 기업(땅)을
분배해주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겼다. 여러가지
이유로 땅을 팔기도 하고 해서, 경작할 땅이 없어지는 경우다. 그래서
하나님이 희년제도를 두어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므로 희년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땅이 없는 가난한
자는 땅을 빼앗긴 것이다.
영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이 집을 빼앗겼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영의 집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깨닫는 자는 복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성령을
받게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 11절「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가복음 4장 11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누가복음 8장 10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세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천국/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것이다. 천국/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자가 누구이며, 씨가
누구인지, 밭(땅)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씨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며, 씨는
하나님 말씀이다. 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한다.
씨뿌리는 밭의 비유에서 네가지 유형의 밭이 소개된다. 즉 네가지 유형의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
만 좋은 밭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에 떨어져서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 좋은 밭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은 땅을 갈아서 씨뿌리기 좋은 상태의 밭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사실과, 이 땅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마음의 밭을 경작한 자가 되는 것이다.
네가지 마음 밭에서, 좋은
밭을 제외한 나머지 밭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밭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과 흑암에 갇힌 자라는 것과 생명과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좋은 밭이다. 그래서 좋은 밭에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탐욕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따라서 마태는 좋은 밭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이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마가나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범죄한 천사의 영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밭에 뿌린 씨에 대해서,“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여기에서
악한 자는 사탄이 아니라, 심령 속에 육적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마가나 누가복음에서는 사탄 또는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사탄과 마귀는 창세기 3장 1-6절에서 발생한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영적 하나님 나라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키는 도구인 것이다. 마가와 누가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영적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 24절「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톤 우라논)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태복음 13장 37-43절『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장
26-28절「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씨라는 것이다. 밭은 성도의 영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는 점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묘사한다. 눈에
보이는 세상 하나님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땅은 세상을 상징한다.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세상에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말씀은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씨가 나서(블라스타) 라는
말은 씨 껍질이 죽고, 껍질 안에 있는 생명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는데,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열매가 된다. 그래서 추수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좋은 씨(하나님 말씀)를 뿌린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뿌린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피와 부활의 살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살을 먹는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세상에서의 구원을 예정하셨는데, 그 첫번째의 언약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이 노아를
택하시고,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언약의
말씀을 계속 이어간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약속을 들어왔으며,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장차 이루어질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며, 성취의 약속을 받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은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24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여기서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현재적 부활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좋은 씨로 말미암아 결실된 알곡(십자가의 죽음)이 천국의 아들들(부활)이
된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악한 자의 아들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나타낼 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마귀 자식이라는 의미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죄인이라는 말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성도의 심령 속에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을 추수 때까지 그대로 주신다. 추수는
알곡을 거두고, 가라지는 불에 태우는 것이다(불세례) 불세례는 심판을 의미한다. 성도가 물세례(죄에 대해서 죽음)와 불세례(옛사람의
죽음)를 받으므로, 성령세례를 받고, 새성전(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불심판때 가라지를 거두어낸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어떤 신앙생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곡이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에는 옛성전이 있고, 새성전이 있다. 옛성전은 육체로부터 나타난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새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를
새사람이라고도 한다.
새성전이 세워지면, 이전에 나라고 생각한 옛성전은 이제 나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성전이 들어서도 옛성전이 바로 옆에 존재한다. 비록 나와 상관없는 것이지만, 계속 존재감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마치 알곡 옆에 있는 가라지가 알곡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내
심령 속의 가라지는 탐욕이 자리 잡고, 육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러나 알곡은 성령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5-8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13장 31절「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가복음 4장 30-32절「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누가복음 13장 18-19절「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성경은 “천국/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했다. 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마가와 누가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가와
누가는 비유를 통해서 점차 자라고 변하여 하나님 나라가 됨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 밭에 심겨지고, 천국이 되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을 표현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 제자들이『우리는 왜 고치지 못합니까』라고 물렀더니『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는『날마다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육정이나 혈통으로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오직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기경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땅이 기경될 때 농부가 씨를 뿌려주는 것이다. 농부가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서 가꾸면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한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된다. 씨를 뿌리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것은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이 산)을 저리로 옮겨버린다. 그래서
저 산(새성전)을 저기서 여기로 옮겨버리라고 하면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권능은 병을 치료하고 죄를 사해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겨자씨 비유는 심을 때는 작은 것이나, 나중에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든다 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이루어져서 말씀의 씨가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큰 나무는 성전을 상징하고, 새는 이방인을 상징한다. 이 공중의 나는 새들이 바로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새들이다. 바로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기 밭에 심은 자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기 밭(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겨자
씨)를 심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처음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약해 보이지만,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이후 권능의 성령이 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될 것을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3장 33절「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13장 20-21절「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룩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아내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오시면, 그 성도가 천국이 되며,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퍼지게 만드는 것이다. 가루 서 말은 세상을 비유하신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하여지고, 확산됨을 의미한다.
마가나 누가복음에서, 누룩 비유의 관점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마침내 큰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누룩이
확산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전했는데, 말씀이 누룩과 같이 퍼져서 신도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룩으로
물질이 변화되면, 원래의 것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1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10장 14절「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 상태가 된다. 성도의 심령에 성전이 세워져도 옛성전의 육적 자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국은 점차 자라서 영적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가 말하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드리고 믿는 것처럼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99세때, 나타나시어, 내년에
아들을 준다고 했는데, 속으로 웃었다. 내년에는 자기가 100세이고 사라가 90인데, 아들이라니뇨?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100세가 되어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낳았다.
하나님은 신이시며, 능치못할 것이 없는 분이시다. 나사로와 같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물 위를 걸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문둥병자를 치료하는 등의 온갖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신도들은 믿음을 자기가 생각하는 믿음으로 받아드린다. 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하여 죽으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 라고 말을 할 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장 16-18절『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부활에 대해서도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으면
믿어야지, 신도들은 계속 육체적 부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현재성에 대해서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을 하는데도, 신도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도들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경의 말씀을 따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에 대해서, 성전은 이제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므로 성도가 곧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고, 예수님이 이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가 성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님은 성도에게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심판받았으므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말이다.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신도들은 예수를 주라고 말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그의 심령 속에 주인됨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런데, 마태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마가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는 곳이다. 따라서 마태는 눈에 보이는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고자 했고, 마가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21-2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0장 25절「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엔 우라노)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0장 21절의
하늘과 10장 23-25절의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서, 같은 개념이다. 세상의 보화와 반대되는 영적인
하늘, 하나님 나라의 보화는 영생인 부활을 의미한다.
부자는 율법주의를 신봉하며,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이야기는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영생에 대해서 물을 때, 예수님과 부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부자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떠나가니, 예수님이 낙타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신 것이다.
부자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부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대체로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찾아온
것이다.
예수가 없는 부자는 천국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심령 속에 주인이 될 때, 그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낙타는
율법주의자를 의미하는데, 율법주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낸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신으로 받들지만, 오직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을 한다. 교회 사람들은 죄를 짓는지 항상 계명에 비추어 자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명을 잘 지키므로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조건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인 메시야를 발견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부자로 상징되는 교회 사람들이 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자기가 믿는 믿음과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있는데, 자기가 믿는
믿음은 율법 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성령으로 난 믿음이라는
것이다. 낙타는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늘귀는 천국/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천국/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해준다. 율법에 대해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부활생명을 얻어야 함을 말해준다.
2. 하나님 나라로만 표현된
부분
마태복음 12장 28절「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0절「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탄(마귀)이 쫒겨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곳에는 귀신이 쫒겨난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영을 지배하는 자가 귀신이었으나, 성령이 지배하므로 귀신이 발붙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의 영
안에는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누가 지배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니면, 사탄의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사탄 또는 귀신이 그 영을 지배한다는
말은 율법주의를 신봉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사탄의
자식들아 라고 말을 했다. 마태복음 12장 34-37절「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권능이 사악한 것이라고
깎아내리기 위해, 예수의 권능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사탄도 집안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 자신의 권능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사탄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앞에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와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알려고 하기는 커녕 "당신이 진정 메시야라면 큼직한 기사 이적을 한번 일으켜 보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어 드리리이다" 이런 요구를 주님께 하고 있다.
마태복음 12장 38-41절「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부활생명을 가진 자가 들어간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자가 하늘에 앉히심을
받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전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며서도, 율법주의를 함께 신봉하는 자는 여전히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려고 한다.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죄인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려고 하는데,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 죄에 묶여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우리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새가
우리의 문이 열려있는데도 나가지 않고, 날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과 사상에 세뇌되어 신도들은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31절「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리라」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이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가겠다고
하고서는 가지 않았고, 작은 아들은 가지 읺겠다고 하고서는 나중에 회개하여 갔다는 것이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작은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한다.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이키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큰 아들은 율법주의 바리새인을 상징하고, 이들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탄의 새끼들이라고
말을 했다.
세리와 창기들은 이방인을 상징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의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던 자들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탕자의 비유처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했을 때,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대답에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하는 자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는 회개하여 거듭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거짓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옛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마치 새사람이
된 것처럼, 예배하고 봉사하고 구원받은 자라고 확신하고 교회 생활을 해도 다 가짜에 불과하다. 뱀의 독에 물려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모두가 다 이런 모습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이처럼』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3장 13-14절의 말씀을 이어받는 것이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놋뱀의 이야기는 민수기(21:8)에
나오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하여금 물려 죽게 하셨다. 그런데 모세가 살려달라고 간청하자, 하나님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들게 하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하셨다.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한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당시의 랍비였던
니고데모였다. 말하자면 니고데모가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다. 오늘날도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 자는 거듭날 수 없는 것이다. 뱀에게 물린 자만 놋뱀을 바라본다. 노아시대 방주에 들어간 자는 의인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 들어간 것이다. 비가 와서 물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120년간 노아가 외쳐도 일곱명만
방주에 들어갔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의의 도를 전하게 하셨다. 물로 멸망시키겠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방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왜 깨닫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뱀에 물린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뱀에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
마태복음 21장 43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비유는 악한 농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열매를 맺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이다. 열매맺는 것은 부활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21장 33절『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한 집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울타리(담)가 있는데,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담을 헐었는데, 율법을
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울타리로 두르고』는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을 나타낸다.『즙 짜는 틀을 만들고』포도주는 하나님 말씀으로 율법을 통한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으로 가는데, 즙짜는
틀은 성전으로 상징될 수 있다.『망대를 짓고』망대는 초막집이다. 이사야 1장 8절에서『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라고
표현한다. 성경에는 장막, 초막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레위기 23장 42-43절, 아모스 9장 11절, 사도행전 15장 16절, 마태복음 17장 4절에서
잘 나타난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농부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성전에서 율법대로 행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시고, 살지 못했으면, 제사를 하게끔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열매는 율법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열매다. 종은 선지자들이다. 이스라엘은
종들을 죽여버렸다. 하나님이 마지막 종(세례요한)을 보내면서 회개를 외치게 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요한도 죽였다. 그런데, 아들(그리스도)을 보냈는데, 아들을 죽여버렸다.『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이스라엘은 아들을 죽여서
유산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포도원 밖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려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시고 바리새인들에게『너희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으니,『악한 농부를 진멸해야 하고, 포도원을
다른 농부에게 세를 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 118편에서 인용한 말이다.
시편 118편 22-23절에서『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예수님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시고,『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버린 돌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받아 흩어져 버렸다.
마가복음 9장 1-3절『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누가복음 9장 27절「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권능은 성령의 임하심이다. 성령 강림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는 것을 천국으로 표현한다. 마가나 누가는 천국이라는
표현대신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으로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육체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천국으로 표현하자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임하시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 즉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성도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다.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의미는『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지게 해 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한다. 통치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 지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하심의 개념이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고 그것을 깨달아라라고 말하고 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 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1차적인 의미는 이 세상에 메시야 왕국이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다스리는,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을 말한다. 천년왕국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세상에서 무엇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해야 될 것은창세
때 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룬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장 40절에『아들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의 뜻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이『창세 전에 이미 세워졌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다 구원하시려는
뜻을 언제 세우셨는가? 창세 전이라는 말은 영원이라는 말이다. 영원이라는
의미를 인간들은『끝없는 시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생각은 이것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안에서는 영원을 이해할 수 없게된다. 왜냐하면
영의 세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는 영원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세계를 바탕으로 영원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물질세계는 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세상에, 흑암에 갇힌 자를 구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흑암에 갇힌 자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자기의 지체가 왜 흑암에 있는가?
요한복음 1장 9절에서『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1장 5절에는『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어두움과 창세기 1장 2절에서 말하는 어두움은 같은
뜻이다.『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없었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서 빛이 비추어진 것이다. 흑암에 빛을 비추어 주신 것처럼, 흑암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춰진 것은 흑암 가운데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흑암은
세상의 흑암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이 흑암인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마가복음 9장 47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은 둘이다. 하나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는 육적인 세상을 바라본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손이든지 눈이든지 그 육체(육체로 비롯된 마음이든지)를 가지고
범죄하면『회개하고 용서를 빌어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범죄한 원인을 제거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원인(옛사람) 제거는 하지 않고,『통회하고 자복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율법주의를
지향하는 눈이 있다면 빼어버리라는 것이다. 실제 눈을 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은 자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날마다 죽노라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기억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본인들이『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라고 주장을 해도, 율법의 존재 이유인 옛사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이해를 해야한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안계시면 죄인이 된다.『하나님이 인간들과 대화하고
바라본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속에 함께 할 때 의인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십계명도 필요가 없고, 율법도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 그 자체로서 완전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율법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성령의 인치신 자에게는 율법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말한다. 정죄는 율법으로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법 적용이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인 것이다. 살아있는 영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율법을 벗어나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자들은 영적인 눈이 열려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닫히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육의 눈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육의 눈을 닫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마가복음 14장 25절「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장 15-20절『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가나 누가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서, 성도가 살아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도 역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라는 새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행사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서,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땅은
가나안을 의미하지만, 새언약은 영적으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인 것이다. 약속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고, 그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성도는
그러한 의미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유월절 음식은 다섯가지가 있다. 첫째,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을 구워서 먹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의미는 죽음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세번째, 쓴나물을 먹었는데, 애굽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다,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나안으로 전진한다는 의미다.
네번째는 포도주를 마셨는데, 네번의 잔을 들었다. 하나는
바로의 고통(사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그 다음은 애굽(세상)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 다음은 죽음의 사자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구원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포도주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마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기까지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월절 음식은 부활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오늘날 성찬식에서 먹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 역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는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부활생명을 얻게 되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임재하게 되면, 성도는 호 로고스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살은 부활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흘리신 피와 살은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희생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은 죄를 죽음으로부터 피하는 것이고, 살을 불에 구워먹는 것은 자신도 불세례를
받고 옛사람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연합되는 자는 포도주는 영생의
음료이고, 빵은 부활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43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데, 병고치는 일과 연계하여 행하셨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는데, 예수님이 고쳐주셨으며,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병고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표적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고치는 일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누가는 병고치는 일과 하나님 나라 복음과 연결시키는 이유에 대해서,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귀신들린 자들이며, 병든 자들이다. 이렇게 병든 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일으킨 기적은 눈으로 보면 물리적인 것이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며, 병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영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8장 1-3절「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귀신들린 자들이며, 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들의 심령 속에 주인은
사탄이었지만,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이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할 때, 병고치는
것과 귀신 쫒아내는 일을 행하신 것은 사람들이 놀라운 그 기적을 보므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때는 열두 제자들과 병고침과 귀신을 쫒아내어 자유인이 된 여인들이
함께 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모습을 보고, 배워서 향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그들이 직접 이런 일을 해야만 하기에,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는 것이다. 특히 병고치고, 귀신을 쫒아낸 여인들이
함께 하므로, 그들이 간증하는 말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는데, 좋은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곱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부활을 목격한 여인이 된다. 그녀는 예수님께 옥합병을 깨고 향유를 머리에
부으신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3-5절『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 그림은 나병환자 시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옥합을 깨고 예수님 머리에 붓는 여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상 왕을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에 신음하는 나병환자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대변자 모세를 통해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가는지를 보여주신다.
이 이야기를 한 여인을 통해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 여인을 통해서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이 이야기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미리암은
헬라어로는 마리아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리아를 주목한다. 그래서 미리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미리암을 통해서 나병환자가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ὃ ἐποίησεν αὕτη λαληθήσεται εἰς μνημόσυνον αὐτῆς.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이
여자가 행한 것이 그 여자(미리암)의 기념적인 일을 위해
회자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여자가 행한 것을 통해서, 모세
당시 누이 미리암의 일들이 기억나게 된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았다. 일곱이라는
말은 나병환자가 일곱째 날에 고침받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레위기 14장 9절『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제사장으로부터 정하다는 판정을 받은 나병
환자는 진 안으로 들어와서 7일 동안 자기 장막 밖에 머물다가 마지막 7일째에 자기 몸에 있는 모든 털을 밀고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물세례) 그렇게 그는 2차 정결예식을 준비함으로써 2차 정결예식(불세례)을 통하여 비로소 이스라엘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그의
옛 지위를 다 회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결의식을 하게하는 이유는 육체의 질병이 다 나앗지만,
이것을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병(죄악)을 낫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에서 지키도록 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하나님을 떠난 나병환자들아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 영원히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정하고 있는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500여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다. 그들은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내용을 깨달았어야만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미리암의 기념적인 일은 그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문둥병자가 되어 진영 밖에서 보내졌고,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는 것(십자가의 죽음)과 기름붓는 모습(성령세례: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마가복음
14장 8절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하나님을 떠난 자(한 여인)는 예수와 함께 죽고(옥합을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기름을 붓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2절「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누가복음 9장 11절「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누가복음 10장 9-11절「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신다. 성령의 능력은 귀신에 눌려 있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죄로부터 벗어나고 새롭게 거듭나게 해 주신다. 하늘로부터 오는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을 낫게하신다는 말은 병을 치유하는 것 외에 죄를 사해주는 의미를 갖는다. 마가복음 2장 9-11절에서『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야이셨다. 그들은 오랜기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는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깨닫고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기는 하지만,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믿음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서 본 믿음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을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서 본 것이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중풍병자는 단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치유받기 위해서 온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중풍병을 고치러 왔지만, 오랜기간 들어왔던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풍병자는 율법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드디어 현장에서 메시야를 중풍병을 이유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기하기 위해 온 것”을 아셨다.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중풍병자의 이 같은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9장 33-35절『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ἀνάστηθι καὶ στρῶσον σεαυτῷ)』 일어나다 라는 헬라어 아나스테디(ἀνάστηθι)는 물리적으로 일어나다라는 의미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의 환자이다. 중풍환자의 영적인 의미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의미한다.
침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 되던 날, 팔년이라는 말은 율법 속에 매여 있던
자를 상징한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할례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고 언약의 표시를 갖는다.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들어가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단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치유받기 위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중풍병을 고치는 목적이지만 오랜기간 들어왔던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풍병자는
율법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드디어 현장에서 메시야를 중풍병을 이유로 만나게 된 것이다.
“자리를 정돈하다” 라는 헬라어 스트로손(στρῶσον)은 자리를 펴다 라는 의미다. 마태복음 21장
8절『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펴는 모습이다. 자리를 정돈하다라고 번역하므로 마치 깔았던 자리를 접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그러나 자리를 폈는데, 다시 재정돈해서 이전의 자리와
다르게 펴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병자의 침대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눕는 자리로 바꾸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율법이라는 자리에서, 복음이라는 자리로 바꾸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60-62절「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세상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상징한다. 그 이유는 영이 육체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는 영적으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어느 유대인이 제자들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런 상황이 불편했다.
밤낮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그들의 축귀를 금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모두가 유대교를 믿는 사회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은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을 악평하고 다니거나 모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오히려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온 예수님 일행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절기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무리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사람들을 미리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보내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사마리아 땅이 아닌 요단 동편의 베뢰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거할 숙소와 식사 준비를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많아
그들을 피해 조용한 사마리아 길을 택했지만 그 곳에서도 거절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예수님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거절한 아주 모욕적이고 적대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분노한 우레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전날 만났던 갈멜산의
엘리야를 연상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는데, 제자들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과 칼, 피와 살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시며
가르치고 계셨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답변에 대한 내용이다. 첫 번째,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지금 당장에 따르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길인지 알려주신다. 집도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확고한 결단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임을 상기시키시고, 예수님을 따르지만 가족과 마지막을 보낼
시간을 달라는 자에게는 세상에 미련을 두는 자는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곧 떠나게 될 것이라는 책망을 하셨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는 주저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유혹을 피하고 어떤 핑계대거나 변명하지 말고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장 3-5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아멘) 진실로(아멘)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겐네데 아노덴) 아니하면(에안) 하나님의 나라(톤
바실레이안 투 데우)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세례로 표현된다. 물에서 죽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표현하는데, 이는 또한 로마서 6장
3-4절에서도 표현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성도를 새피조물로 만들어주신다. 그래서 죽었던
영이 일어나, 영의 몸을 입고 하늘에 앉히심을 받는다. 성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천국에 앉히심을 받아있다가, 육체가 죽은 후에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멘 아멘이라는 말은 정말로 그러하다는 말의 표현이다. 거듭나다
라는 표현의 겐네데 아노덴(γεννηθῇ ἄνωθεν)은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의미다. 한글
개역개정에는 거듭난다 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으나 이는 모태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의미로 거듭나다 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아노덴(ἄνωθ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순간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통치의 개념이다. 아직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으므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를 표현한 것이다. 에안(ἐὰν)은 만일 이라는 가정법이다. 가능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원의 핵심은 위로부터 남이다. 예수의
피로 죄를 씻는 것은 세례의 결과다. 세례는 죄를 짓는 옛사람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살게하신다. 그래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회개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살기 때문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3장 14-15절의
말씀을 니고데모가 받지 못한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 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신앙인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례가 열처녀의
비유다. 모두가 다 신앙인이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구원받지 못했다.
미련한 다섯처녀의 기름이 떨어질 때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 부터 들은『인자가 뱀처럼 들린 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민수기 21장 8-9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라고 하신 말씀을 재조명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믿는 자가 다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니고데모가 믿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를 믿지만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퍼져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회개한 적이 없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마술장이 시몬이 그러했다. 빌립 집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시몬에게 와서『네 속에는 악독이 가득한 자』라고
말했다. 시몬이 니고데모가 그러했듯이 베드로의 말을 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독사의 독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말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하늘의 빛이 비춰져야만 알게되는 것이다.
3.
복음서의 천국에 관련된 것
마태복음 3장 1-2절「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메타노에이테)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엥기켄) 하였으니」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천국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누리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메타노에이테(μετανοεῖτε)는 메타(뒤에)와 노에이테(기본형
노에오:마음)의 합성어로서 마음을 뒤로 돌리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을 뒤로 돌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자기의 의를 쌓는 것이다.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할 때, 죄를 지은 것을 반성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회개에 담긴 큰 의미는
죄를 짓게 하는 탐욕의 마음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이다. 엥기켄은 바로 옆에 있다는 의미다.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을 천국(하늘 왕국)이라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천국은 한자어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 왕국이다. 천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드디어 세상에 등장하였으니 회개하여 모두가 천국이 되라는 말이다.
관사없는 단수 우라논은 눈으로 보는 하늘이다. 관사가 없는 복수 하늘은 세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관사가 있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관사가 있는 복수하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6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다고 증거할 정도로 세례요한은 인정받고 있었고, 명성도 드높았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때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증언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았다. 사람들이 혹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리스도이신지를 궁금해 하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앞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거하는 자며, 자신이 주목을 받을 자가 아니라 그 주목을 하나님의 아들께 드리기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회개를 외치는 것이다. 천국(예수 그리스도)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시자 세례 요한은
고백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았으나,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신,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알았다. 요한은『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선 분이 바로 이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또 증언한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죄의 문제)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이 내려 머무는 사람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부활) 베푸는 이인 줄로 알라 하셨고, 그리고 내가 보니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머물렀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증언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십자가의 죽음),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분(부활의 첫열매) 예수님을 증언하며 마침내 세례 요한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고, 아무도 그분을 모를 때에 그 분의 길을 준비했다. 아무도 메시아가
그렇게 오실 것을 원치 않던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을 염원하며 그렇게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의지하며 집중하도록 하지 않고, 구약이 예언한 오실 분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르도록 하였다.
마태복음
4장 17절「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자신이
천국임을 밝히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됨도 나타내셨다. 돌성전은
무너져야 할 성전임을 말해준다. 자신의 몸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1-2절「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에수님은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부활의 몸을 세성전으로 표현했다. 옛성전은
무너져야 할 성전이고, 새성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전을 의미한다.
새성전은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심으로 세워진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세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보좌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장막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돌이켜 하늘로 태어난 자에게 성령세례를
주신다. 물세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이다. 형식적인
의식으로서 세례이지만, 영적으로는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다시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에게 주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소명을 받은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요한복음 1장 33-34절『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신도들은 세례를 받는데, 대부분 물세례만 알고 있다. 그러나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알고 있는 신도들은 많지 않은 것이다. 불세례와
성령세례는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물세례와 불세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세례는 다시 태어남을 상징한다. 불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해서, 마태복음 3장 11-12절에서『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천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제자나 성도에게도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바로 성령세례를 통해서,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 성전에 예수님이 임재하시면, 천국이 되는 것이고, 새성전이 아니라, 옛성전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주인인 자는 영에 있는 자가 아니라, 육에 있는 자가 되므로, 옥에 갇혀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마태복음 5장
19-20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5절『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Ἐὰν ἀγαπᾶτέ με, τὰς ἐντολὰς τὰς ἐμὰς τηρήσετε·) 테레세테(τηρήσετε),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레세테의 기본형은 “테레오” 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문자적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문자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30-31절『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성령이 주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에 두고, 마음 속에 간직한 모든 계명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이다. 그 계명에
대해서 성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얽매인 율법주의를 폐한 것이며, 그
속에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게 되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얽매인 자들은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오늘날 십계명이 다 폐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신도들도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신도들은 십계명을 철저히 지켜 나가야 하며, 못지킬 때는
죄를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또 계속하여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자는 의미로 받아드린다. 이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해 주셨는데, 계명의 문자에 얽매여 있으므로
스스로 피곤한 삶을 삶을 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의 마음으로 재해석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십계명의 규정은 하나님이 이 땅의
일을 통해서, 인간들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해주시며 회복해야 할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십계명을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그 규정에 맞게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께닫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열가지(십계명)의 항목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나서 밝은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는가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지키는
자가 마음 속의 하나님 나라인 천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마음 속의 천국으로 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신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바탕으로 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프뉴마티 하기오) 안에 있는 의(뒤카이오쉬네)와
평강(에이레네)과 희락(카라)이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성부 하나님이 다스리는
특별한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육적으로 먹고 마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 나라가 먹고 마시는 어떤 율법의 규정에 매여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덕목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이유는 그에게 부활생명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의인이라는 말은 의로운 행동을
하거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활생명이 있는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헤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여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아들이 되셔서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하나님이 스스로 아들이 되신 이유는 아들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는데, 빌립보서 2장 6절에서『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라고 말을 한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가?
첫째,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계시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도
역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라고 부른다. 만일 신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이미 그는 다른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는 죄인들을 하나님 아들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간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천국이 된다는 말이다.
먼저,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마태복음 3장 13-15절『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지만, 이후 제자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위임한 사람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모든 자들을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임하셨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오늘날 성도들도 이렇게 물에 들어가서 죄의
몸이 죽고(십자가의 죽음), 물 밖으로 나오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다시 태어나는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으로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 마태복음 4장 1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시험은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에 대한 시험이다. 오늘날 신도들도 세례를 받은 후에 예수님과 같이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보신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5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부활은 죽었던 육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0절에서『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승천한 것이다. 에베소서 2장 6절『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하늘은 톤 우라논으로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게 새하늘과 새땅으로
표현되는데, 이 새성전에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천국)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11절「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앉으려니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증명하는 것이 언약식이다.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약속하셨다.
창세기 26장 4절에서『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약속하셨다. 창세기 28장 13절에서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을 애굽에 400년간 종살이를 시킨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애굽은 세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것을 깨달아 하나님께 회개하여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자식을
준다는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시험하셨다.『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는
것이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은 것이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나님은
이삭으로부터 나온 씨가 약속의 씨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장 18절에서『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9장 7-8절에서『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육체를 따라 난자 (이스마엘)는 율법을 나타내고, 약속을 따라 난 자(이삭)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성령)를 나타낸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약속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 성령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한다. 오늘날에도, 율법적으로 살면 안된다고 말을 해도, 교회에서 여전히 율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백부장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는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그렇게 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천국이 된다. 그리스도가
천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들어가서 그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역시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율법을 문자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전히
율법을 따르려고 하는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지 못한 자들이다.
마태복음
10장 7절「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이 가까이 왔다 하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전도여행을 보내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는 것이다. 이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육으로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켜 메시야이신 예수께로 오라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병든 상태가 된다.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다. 하나님의
언약의 일차적인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지금 잃어버린 양의 상태였다.
예수님께서 병든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로 돌이키지를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천국이라고 말을 했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결국 천국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천국을 없애버리고,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지옥은 심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평안을 들고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로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했다.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거나 옷자락을 털어 버리는 행위는 심판을 보여주는 행위다. 예수님의 거저 받은 평안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인데 이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한다.
이러한 평안의 소식을 거절한 1차 도시가 예루살렘이였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향하여 탄식하신 이유는
평화의 소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가 된 것이다.
지옥은 교회 사람들이 불타는 지옥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왜곡된다. 성경에서는 교회사람들이 생각하는 “불타는 지옥”의 의미가 타르타로, 하데스, 게헨나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첫째, 타르타로 대해서는 베드로후서 2장 4절에『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로)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로 표현되었다.
지옥이라고
표현된 타르타로는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므로 지옥에
있는 것이다. 현재적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천국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하데스는 음부를 의미하는데, 음부는
둘째 사망을 나타낸다. 곧음부는 불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서『사망과 음부(하데스)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음부로 표현된
하데스는 갇히는 지옥의 개념이 아니라, 불을 받는 것이다. 즉
둘째 사망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이 곧 불뭇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첫째 사망은 영이 흙에 갇히는 것을 영적으로 첫째 사망으로 본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네크로스)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성령의 불과 하나님의 말씀(못)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는 의인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9절에서『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불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옛사람은
불세례로 죽고 성령세례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그리고 성도에게 연단의 의미로 주는 불이 있다. 불세례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의미가 있고, 불은 연단의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불세례는 창세기 19장 24절에서『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롯과 가족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에서『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불세례는 심판과 구원을 나타낸다. 당하는 쪽은 심판이고, 피하는 쪽은 구원인 것이다. 소돔성에 있는 자들은 비진리에 있는
자들이고, 고통당하는 롯은 진리에 있는 자인데, 하나님이
불세례를 통해서 진리에 있는 자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불세례는 옛사람(육적 혼이라는 옷)을 불로 태우고 새사람(그리스도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셋째, 게헨나는 쓰레기를 불로 태우는 의미를 갖는다. 불은
연단의 의미도 갖지만, 연단되지 않는 불은 고통을 주는 불이 된다. 그런데, 게헨나를 지옥으로 번역하므로 의미가 혼란스럽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게헨나는 성소의 마당에서 희생제물을 잡고 그 동물의 사체를 성문 밖에서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 쓰레기
처리장인 것이다. 예레미야 7장 31-32절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힌놈의
골짜기에서 게헨나가 나타났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밖 남동쪽의 쓰레기 장이었다.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것이다. 사체에서 구더기가 나온다.
마가복음 9장 48절에서는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몰렉에게 자녀를 태워 제사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성전의 타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을 비유하자면 교회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타락한 교회 안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와 타르타로와는 다른 개념이다. 타르타로는 갇혀있는 어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지만, 게헨나는 지옥이라기 보다 불로 태우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쓰레기를 불로 태운다는 의미는 불세례와도 다른 이야기다. 불세례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게헨나는 쓰레기를 태우는 의미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혀의 불로 다른 사람을 불로 태우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불로 태우려는 것이다. 신도가 자기를 태울 때는 연단이 되지만, 타인을 불로 태울 때는 그야말로 지옥불이 된다. 그는 지옥불에 사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모든 사람에게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육체가 죽어서도 연장되는
일이다.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천국이 되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지옥이 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회개하여 불세례(둘째 사망)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불로 연단을 받아 더욱 정금과 같이 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1장 11-12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이라고 번역된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율법시대는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이 세례요한까지 로서, 이는 심령
속에 세워진 옛성전을 의미한다. 이 옛성전에 주인이 자기라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믿음의 성도에게 심령 속으로 침노해 들어가, 옛성전을
파괴하고, 새성전에 주인으로 계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침노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침노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옛성전으로서,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적 자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침노하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 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짜 복음을 내세워, 신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들을 한다. 가짜 복음이란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를 의미한다. 대부분 교회
안에 이런 가짜 복음이 너무나 만연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2절의 말씀을 성도는 구원을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원은 각자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몸부림 친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침노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말은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폭력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폭력자에 의해 옛성전이 파괴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새성전으로 복귀시켰다. 이게 바로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심령 속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
성도의 역할은 사람마다 세워진 성전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속량은 피값을 주고 산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탄으로부터 죄인들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 묶여 있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심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옛성전은 사탄에 의해서 침노를 당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에게 심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영적 전쟁과 같은 것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낙자손들과 싸운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 것이 그들을 영적으로 살리는 길이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온 자였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서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엘리야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자였다. 말라기 3장 1절에서『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마태복음
18장 1절「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세상에 세워질 메시야 왕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바로 메시야 왕국으로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할 때, 누가
크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높은 자리, 큰 자리, 또 영향력 있는 자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의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던 생각이 있었다. 메시야 왕국은 아주
큰 부자, 높은 자, 영향력 있는 자를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와 같은, 세상에 물든 생각을 고쳐
주시면서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인지 나아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는 누구인지 이렇게 두 가지의 답을
주셨다.
천국에서 큰 자와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는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얼마나 상충되는지를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중요하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다.
천국은 육으로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큰자가 되고, 자기를 내세워 큰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자에게는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메시야 왕국인 천국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
역시 메시야 왕국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불의한 세력을 멸하고 이스라엘 땅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때 즉 마지막 심판으로 인한 회복의 때가 바로 지금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에스겔 37장 1-5절에는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환상과 두 막대기가 하나 되는 환상이 등장한다.『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기서 마른 뼈는 죄로 인해 심판을 받고
나라를 잃고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물론 두 막대기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죽은 지 오래되어 뼈조차 말라버린 마른
뼈의 환상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생기가 불어오자,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었다
했다. 또 유다와 이스라엘이라고 쓴 두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서 합쳐져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여주신다. 남북왕조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진
이방 땅에서 돌아와 하나의 나라로 회복될 것을 보여주신 환상이다.
스가랴
12장 6절에는 때가 되면 이렇게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하게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스라엘의 회복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인 회복을 말하겠지만, 영적으로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성전은 무너지고, 새성전이 세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새성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다.
에스겔 37장 23-25절『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이 보내신 통치자, 바로 다윗의 후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왕이 되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귀환 사건 때는 성취되지 못했다. 그 후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셔서
이 예언의 말씀이 다시금 성취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저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예언의 성취가 다시금 미뤄지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므로, 새성전이 그들의 심령 속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 심령 속에 세워진 새성전으로 들어가서 말씀이신 호 로고스로 임재하시는 것이다.“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라”하신 이 예언은 성도에게 예수님의 재림으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예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심령 속으로 들어와서 이미 그들의 주인이 되셨으며, 그들의 영은 하늘에 앉히신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을 한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므로,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말을 한다. 천년왕국은 성도의 심령 속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인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3-4절「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의미는『육적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누가 큰 자인가를 물었다. 결국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육적 자기를 낮추는 자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가 되며, 메시야 왕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작은 어린아이와 동일시하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큰 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능력이 없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면, 그것을 예수님은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시겠다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환영하고자 한다면 작은 자 하나를 받아 환영하면 되며,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접하면 주님께서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죽어있는 영, 갇혀있는 영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작은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이
갇혀있는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풀어줄 수 있다면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죽어있는 영에 대해서 관심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곧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세상의 가치를 따라 무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18장 10절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1-23절「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18장 35절「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호 우라노이스)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21-23절은 복수인 하늘 나라(천국)이지만, 마태복음
18장 35절은 단수인 하늘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심령 속의 천국에서 정해지면,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 나라에서도 같은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 사하심과 심판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데,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는데, 몇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일곱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는지 물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무한정 용서를 해 주라는 말씀이다. 용서를
무한정 해 주어야 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1 만
탈란트 빚진 자요, 형제는 100 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말이다. 1 만 탈란트와 100 데나리온은 비교가 안된다는 말이다. 1 만 달란트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10억 달라 정도의 가지가 있는데, 100 데나리온은 노동자 3개월 정도의 월급(수천불 정도)에 해당된다. 십억
달러와 수천 달러의 비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미『하나님으로 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죄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다. 이제 탕감 받은 후에 100 데나리온의 문제, 즉『남을 용서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말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영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다시 죽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 우리가
미움과 질투를 받으면 저주가 발생한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 열명이 요셉을 죽이려하다가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이게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 것과 같다. 그리고 요셉은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도
누구엔가 미움을 받으면 인생이 갇히는 수가 있다. 인생이 오도가도 못할 때 인생이 갇힌 것이다. 요셉은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보디발 아내의 거짓말에 의해 또 갇힌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혔다. 꼼짝 못하는 감옥에서 하나님 말씀이 임하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용서라는 말이다.『팔아버린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용서할 대상을 주실 때는『가장 비참한 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배신당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가장
비참한 때에 온 인류를 용서하신 것이다. 용서를 하면 부활의 역사가 시작된다.
예수님이 죄에 대한 예화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죄사함받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마태복음 20장 1절「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심령 속에 세워진 포도원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 포도원이 바로 에덴이고, 성전이라는 말이다. 포도원과 품꾼을 통해서 천국을 설명하는 것이다. 포도원에 들어오는
품꾼이 바로 천국에 들어오는 자가 되는 것이다. 먼저 들어오던 늦게 들어오던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얻어서 포도원에 들여보냈는데, 포도원 주인이 아침부터 들어온 자와 오후 늦게 들여온 자에게 동일하게 품삯을 주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들어온 품꾼은 상대적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원주인에게 진정을 하니,
포도원주인이 말하기를 계약대로 품삯을 준다고 말을 하고,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자도 동일하게
품삯을 주는 것은 포도원 주인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자를 상징하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 말하려는 비유인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구원은 마태복음에서 어느 왕의 혼인잔치 비유라든가, 로마의 백부장 부하를 치유한 사례,『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이 먼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1장 25-27절에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22장 2절「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어떤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지칭한다. 교회는 바로 성도이며, 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신부 삼아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천하만민 중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만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인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게 부활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율법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말한다. 율법은 그 속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초청장인 것이다. 이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 보내지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초청장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다.
2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22장에서 혼인잔치 비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청함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온전히 통치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는 성령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땅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면 육적인 몸을 벗고, 영의
몸(부활)을 입어야 하는데,
그들의 눈으로는 영의 몸(부활)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육으로 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영의
몸이 의의 옷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몸을 말한다. 그들은
부활을 알고 믿지만, 현재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종들(선지자)을 보냈으나,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죽였다. 심지어 아들까지 죽였다. 이사야 49장 6절에서
『그가 이르시되 네(그리스도)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그리스도)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부활을 위한 초청장을 보냈지만,『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홀히 하여 알 수 없게 된 것이다.『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으로』의『자기』라는 말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자기가 주인 사람은 육체가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부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자기』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악(탐욕)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버리라고 말하는데, 비유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중시하므로,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다섯겨리(25마리)를 샀기 때문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부활보다 이 세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육체가 죽어서 부활함을 믿었기
때문에 현재적 부활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초청장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교회 안에서도 현재적 부활생명을 전하는 자를 모욕하고, 정신적 살인을 강행한다.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로 갔다.『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네거리는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경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서 권능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여기서 악한 자와 선한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을 발견하고
잔치 집에서 내 쫒았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예복은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이
혼인잔치 집에 준비되어 있는데,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인잔치
집을 채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옷(부활)을 입지 않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을 벗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의의 예복(부활)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육체가 죽어서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흙에 갇힌 자라는 말이다.
자기의
옷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는 자들이다. 자기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복은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옷을 벗고(예수와 함께
죽고), 준비된 예복(현재적 부활)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3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 앞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κλείετε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ῶν οὐραν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ἀνθρώπων)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사람들 앞에서 천국을 닫고 라는 말이다. 문이라는 말은 없다. 그들이 천국을 닫는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방해한다는 것이다. 방해하는 방법은 율법주의를 통해서 방해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세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메시야 왕국을 오해하는 자들이다. 세상 속에서 메시야 왕국을 생각하며, 오늘날도 예수님이 재림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천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개념이다. 천년왕국이바로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한다. 천년왕국을 이 세상에 예수님이 재림해서 왕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온갖 이상한 교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휴거, 7년 대환난, 천년왕국
등은 성경학자들이 사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과 영적으로 표현된 것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때로는 부분적으로는 성경적인 내용이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신앙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진리인양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앙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조직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휴거,
7년 대환난, 그리고 천년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바, 이는
요한계시록 등 성경의 여러 귀절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학설적으로 종합정리를 한 것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이들을 영적인 의미로 받아드리지 못하면, 신도의 신앙의
목표가 휴거로 집중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휴거에 대한 말이 없다. 다만 휴거로 오인할 수 있는 성경 귀절이 있는데,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8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파루시안)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카타베세타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4장
15절의 강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과 4장 16절의 강림인
카타베세타이(재림)는 다른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그리스도 이전의 믿음의 선진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성도들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영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파루시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카타베세타이이고,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임재(파루시안)하시는 것이다.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이전의 것이 죽고,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호 로고스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는 영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라는 것은 육적 몸이 갑자기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것은 죽고, 영의
몸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휴거를 믿는 신도들은 허망한 결과가
되므로, 육적 눈으로 바라보는 학문에서 벗어나, 성경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종말론에서 말하는 학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학설들을 살펴보면,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있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다는 것이며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후에 있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주장으로 “천년왕국은 단지 상징일 뿐 천년왕국은 없다”거나 “그리스도 승천 이후의 전 교회시대가 천년왕국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전천년설도 휴거의 때에 따라 여러가지
학설들로 나뉘어 있다. 성도의 휴거가 언제 있을 것인가를 7년
대 환란과 연관해서 보면,
첫째는 환난전 휴거설로 이를 주장하는 자들을
세대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는 7년 대 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이 모두 휴거된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환난후 휴거설로 성도들은 모두 다
대 환난을 겪어야 하며 이 환난이 끝난 후 모두 한꺼번에 휴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역사적 전천년설
이라고도 말한다.
셋째는 환난중간 휴거설로 7년 환난을 전3년반, 후3년반 둘로 나누어서 환난 중간 때 모든 성도들의 한꺼번에 휴거를 한다는 주장이다.
넷째는 부분 휴거설로 이는 7년 환난 기간 동안 성도들 각자의 믿음이 성숙함에 이르게 될 때 부분적으로 계속해서 휴거된다는 주장이다.요한계시록을 육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재림과 휴거가 기정사실로 받아드린다.
요한계시록 10장 1절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휴거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전3년반의 환난의 때가 시작되고 그 전3년반의 마지막 쯤에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이 그 두 증인을 죽이지만, 두
증인은 삼일반에 부활하고 휴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이어 일곱째 마지막 나팔이 불게 되며
성도들의 중간 휴거가 있게 된다. 그 후에 곧이어 후3년반의
대환난 핍박시대가 있으니 이 때는 해를 입은 여자(성령)의
때이다. 이 여인은 후3년 반 동안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된다. 즉 교회가 사탄의 세력에 핍박을 받게 되지만 그 마지막에 해 입은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악한 세력들과 싸울
준비를 하게 된다.
이 남은 후손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 14만 4천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인침)를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또 지상재림의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군인들로 악의 세력과의 싸움을 하게 되며, 일곱 대접 쏟는 재앙으로 악한 세력들을 공격하고 마지막 일곱째 대접 쏟는 재앙 즉 아마겟돈 전쟁에서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는 자들이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사탄은 결박되어 무저갱에 천년동안 갇히게 된다. 이 땅에는 천년왕국 시대가 도래되며, 이 때 14만 4천은
순교자들과 함께 이 땅에서 천년왕국 동안 왕노릇 하게 된다(계20:4).
그 후에 사단은 결박에서 풀리게 되어 사람들을 미혹하고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키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 세력을 소멸하게 되고 사단은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 즉 지옥에 던지게 된다.
그 후에 곧바로 불신자들이 부활해 예수님의
백보자 심판에서 정죄를 받아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져지고, 거기서 영원토록 극한 고통을 면치 못하게
되지만 성도들은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영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상의 메시야 왕국으로 오해하여 나타난 학설과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서 믿을 것이 못된다.
마태복음
25장 1절「그 때에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천국을 성령과 연결시킨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권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열처녀는 모두 등불을 가졌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다른 기름통을 가진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고 받아드린 자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처녀는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된다는 것을 믿으므로, 결국 어둠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절에서『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그릇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때 표현하기도
한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부활)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보배는 그리스이시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인간을 의미한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게 부활생명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부활생명을 가질 수 있다.
기름은 감람유를 의미한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하는 감람유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성령이 임한 것을 기름부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1서 2장 20절에서『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장
27절에서『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성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들어오신 것(성령세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허ㅏㄹ생명이 되는 것이다.
결국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믿는 부활생명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부활)이 되어 빛의 생명(부활)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자가 된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육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이다.
부활이 육체가 죽어서 이루오 지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4. 왕국 복음
마태복음의 세곳에서 왕국(나라) 복음(테스 바실레이아스)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한글 개역개정은 천국으로 번역했다. 왕국은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다 포함한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에게 이루어지는 천국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
23절「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13장 38절「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태복음 24장 14절「이 천국(테스
바실레이아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것은 영의 일체성을 의미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원래 이렇게 하나였는데, 범죄한 천사로 인해서 안식이 깨어지고, 그들의 영을 가둘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시어, 하나님 자신이 성령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과 성령 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누어지고,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범죄한 천사들의 영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을 하신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은 영이 육체에 갇힌 모양이다. 성령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성령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육체에 갇힌 영이 일어나고,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한 자들은 성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인들이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성령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로마서 8장 1-2절『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로서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이다.『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원래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범죄함으로
인하여 성령 밖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씀이다.
요한일서 5장 6-8절『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물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성부를 상징하며,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상징인
대속의 죽음을 의미하며, 성령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에게 부활생명을 주는 것을 증언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 안에
있는 자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1-13절『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생명은 부활생명을 의미하며,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으면 영생이
없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세분의 하나님이 각각 존재하시면서 하나라는 말은 성경 그 어느 곳도 없는 말이다. 성경학자들이 유추해서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하다.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것을 신도들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며,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가 성령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활생명을 받아야 하는데, 부활을 죽었던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거나, 죽은 후에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면, 현재적으로
신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5. 하늘
(복수 하늘)
마태복음 3장
16-17절「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호이
우라노이)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톤 우라논)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장 10-11절「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투스
우라노우스)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우라논)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등장하는 하늘은 관사가 있는 복수 하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순간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역시 이와
같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아들이
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삼위일체 이론을 근거로 예수를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안으로 들어오는 자를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고 싶으신 것이다.
삼위일체의 사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하나님이신데, 세분의하나님이 하나라는 말로
설명한다. 마치 하나님이 세분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이해불가능의 말로서
신비를 조장한다. 삼위일체의 사상은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도 되며, 하나님의 아들도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잉태되었으며, 그는
태어나서 30세가 되던 때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첫사람 아담의 죄의 몸을 이어받았으며,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죄의 몸이라는 사슬을 끊어셨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므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 그래서
죽은지 삼일만에 영이 부활하신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부활이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는 것이다. 육은 죽으므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이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후에, 세상에 사십일간 있다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2절『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몸을 의미한다. 죄의
몸으로 대속의 죽음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그는 육의 몸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는 첫사람을 의미한다. 육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첫사람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첫사람은 죄의 몸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오신 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것은 영의 일체성을 의미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원래 이렇게 하나였는데, 범죄한 천사로 인해서 안식이 깨어지고, 그들의 영을 가둘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시어, 하나님 자신이 성령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과 성령 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누어지고,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범죄한 천사들의 영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을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2절「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장 23절「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토 우라노)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마태는 복수 하늘, 누가는 단수 하늘로 표현하였다. 마태는 현재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로, 누가는 육체가 죽어서 가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표현했다. 그 날이라는 말이 의미를 준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전하면, 율법주의자들은 핍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준은 율법주의이기 때문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인데,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희생제사를 통해서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율법은 엄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 속에 생명나무(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죄는 그 열매를 먹는 것 이전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나무를 통해서 그 탐욕의 마음이 있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죄가 아니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제거한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 안에서 만연한 율법주의(인본주의) 사상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 속에서 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명에 얽매여 그것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규정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침을 내리는 듯한 말도 다 율법주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목사들은 자기를 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인본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은 행동을
강조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규정을 들어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행함으로 나타나지만, 행함을 의무적인 규정처럼 생각하게 한다면, 율법주의 생각인 것이다. 행동을 강조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를 섞는 기독교는 이미
참된 진리의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종교가 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적 분별이 있으면, 열처녀의 비유처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가 섞여 있음을 알게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며, 양과 염소의 비유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톤 안드로폰)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토이스 우라노이스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셋째 하늘인 천국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톤 안드로폰(τῶν ἀνθρώπων)은 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착한 행실은 『선한 사역』으로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하나님을 떠난 자를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교회 안의 이야기가 된다.
구약시대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었으며, 성부를 상징하는 두 돌판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맛나와 성령을 상징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고 히브리서에는
증거한다. 히브리서 9장
4절「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면,
성령으로 성부와 연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된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셨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들 안에 거룩한 영(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세례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소유한 거룩한
성전이 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을 "성도", 즉 거룩한 무리(구별된 무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복음의 가장 핵심적 목적은 신도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 성전을 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마태복음
6장 1절「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를 구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죄인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죄인을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은 자는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구원을 얻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자들이며,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악이 가득한 자이며, 자기도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항상 덤덤하고
자기 원하는 것을 쉽게 기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회개의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가출한 자에게 아버지가『이제 그 마음을 죽이고
돌아오라』고 하실 것이다. 그 마음이 죽어야만 한다. 이게
회개다.
그런데 그 마음이 죽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하면, 다 받아주실 것으로 오해한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아버지로만 생각한다. 죄를 징계하는
아버지의 두려운 눈빛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죽지 않으면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마음이 죽을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다. 이게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그
문이 좁고 협착해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찾는 자도 적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만 이 문을 찾게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좁고 어렵기 때문에 이 문을 싫어한다.
문이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평생 예배한다고 반드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제자들도 되지 않았다. 구원이
쉽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다. 구원이 쉬워보이는 길은 멸망 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셔도, 사람들 스스로 회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9-10절「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헤 바실레이아)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 라는 말이며, 기도하는 자는 땅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넣으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요, 세상에 갇힌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된다.
예수님이『하늘(우라노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다. 우라노스(영어 heavens)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복수로 사용될 경우에는 성도들의 하나님 나라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나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하늘로부터 세워진 성전이 있는데, 이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시는 모양과 같은 개념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성령이 계신다고 했지만,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나라는 바실레이아로서 왕국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권능이 임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의미는『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지게 해 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한다.
통치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 지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하심의 개념이다. 성령이 100% 임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요, 하나님의 완전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의미는『이
세상에 임하여 달라』는 의미도 있고,『내 안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의미도 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고 그것을 깨달아라라고 말하고 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 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1차적인 의미는 이 세상에 메시야 왕국이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다스리는,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을 말한다. 천년왕국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세상에서 무엇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해야 될 것은『창세
때 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룬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장 40절에『아들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의 뜻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이『창세 전에 이미 세워졌다』라는 말이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를 위해서 이 뜻을 세운 것이 아니라,『흠이
있고, 거룩하지 못한 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뜻을 세우셨다. 『흠이
있고, 거룩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말한다. 창세
전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이런 뜻을 세웠겠는가? 창세
후에 발생할 일에 대해서『다 아시고 이런 뜻을 세웠다』고 말한다면,『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지 못하고
변형될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너희가 사람의 잘못(파랍토마타)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호 우라노이스)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가복음 11장
25절「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죄와 허물이라는 말을 한다. 에베소서 2장 1절「그는 허물(파랍토마신)과 죄(하마르티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마태복음 6장 14절에는 파랍토마타를 잘못이라고 번역했고,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허물로 번역했다. 파랍토마신은 옆으로 미끌어지다, 탈선하다, 과오를 범하다 라는 의미다. 그러면 하마르티아는 죄라고 번역했는데, 로마서 5장 12절에서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따라서 이 죄는 세상에 있는 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세상으로 들어온 죄를 말하며, 결국 에덴동산 즉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죄를 의미한다. 이 죄를 사람들은 원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파랍토마타는 세상죄를 의미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라고 말을 한다. 요한복음 1장 29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죄와 모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하심을 얻는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모독죄라는 것이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그 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재자로 나사서 그의 피로 예수와 연합된 자를 용서해 달라고 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하나님께 죄를 지은 자인데, 용서해준 것 같이 남을 용서해주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잘못은 타인이 자신에게 행하는 행하는 것인데,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이 사단의 가시를 들게 할 것이다.
그런데, 개역개정에서
빚을 죄로 번역한 것이 있다. 마태복음 6장 12절『우리가 우리에게 죄(오페일레마)지은
자를 사하여(아피에미) 준 것 같이 우리의 죄(오페일레미)를 사하여(아피에미) 주옵시고』
헬라어 아피에미를 우리에게 죄지은 자라고 표현했는데, 생략하다, 면제하다 라는 의미다.
오페일레마는 죄라기 보다는 빚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진 빚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죄로 인하여 세상에 흙으로 된 인간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는 빚이 있는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그 빚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어므로 갚아준 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적지 않게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진다. 죄를 짓는 빚, 신세를 진 빚, 돈을
빌려서 갚지 않는 빚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빚이다. 이 빚들은 영적으로
죽어있으므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다시 번역해보면,『우리의 빚을 우리에게 탕감해주듯이(호스 카이 ὡς καὶ)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도록 하고』호스 카이에서
영어 번역은 as also로 번역하므로 ~주듯이 라고 번역했지만, 호스는 관계대명사로 보아야 한다. 빚은 죄를 의미한다. 한글 개역개정은 헬라어 성경의 내용의 뒷부분을 앞쪽으로 번역했고, 앞부분을
뒤쪽으로 번역했다. 먼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청산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5-26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호 우라노이스)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장 31-32절「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호 우라노이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보좌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예배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먼저 추구하라는 것이다.
내일 하나님 나라와 의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염려하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라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열심히 사역을 하는데, 어느 날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고 심령 속의 임마누엘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 염려해야 하는 것은 임마누엘이 되는 것인지를 염려하라는 것이다.
염려와 두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한다. 두려워하는 것은
심판받을 죄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는 불못에 들어간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한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위로하지
않으신다. 잠언에『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거니와』라고 했다.
속박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편강도가 좌편강도에게『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둘째
사망으로 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제자들이 두려워 떨었다. 예수님이 그 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도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도 예수님은 주무실 수 있다. 에수님이
찾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제자들은 풍랑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가 가라앉고 가라앉지
않고는 에수님의 손에 달려있다. 즉 죽고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를 깨울 때까지 주무시는 것이다.
인생의 배에 풍랑이 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인생의 배가 가라앉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깨우는 사람인가? 구원받는 믿음은 증명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주무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깨울 때까지 기다리신다. 믿음은 상황에 반응하지 않고 예수님께만 반응한다. 이 땅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구원받는 믿음은 능히 주님을 신뢰하게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그
두려움 속에는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풍랑으로 부터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자는 주님께만 반응하는 자들이다. 상황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염려에 대해서는『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거듭난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육이 주인이므로 항상 염려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두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영의 몸과 육의 몸이다. 그래서 육의 몸을 부인하라고 하신다. 영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몸이다. 비록 거듭났을지라도 현재 육의 몸이 있으므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에
예수님이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다만 세상에서 있는 동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길만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1절「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호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는
것인 임마누엘 신앙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4-11절에서『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네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니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해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다.
마태복음
7장 21절「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늘로 부터 태어나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죽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 날마다 죄를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 날마다 죽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죄를 다 가져갔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매일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른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죄인들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들이 스스로 아무리 믿습니다 라고 외쳐도, 예수님이 세상에서 이루신, 세상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는 말씀을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가 된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모르면 곤란하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 라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서 같이 죽어가던 죄인이라든가, 문둥병자,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들이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냥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구원받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4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라는 표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라고 표현을 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늘로부터 난다』라는 말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죄가 다 사해지고, 의로워져서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안 믿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우리가 큰 권능도 행하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했는데, 예수님, 어떻게
우리를 모른다고 하십니까?』 라고 말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열심히 예수를 믿고 온갖 일들을 행했던 자들인데, 왜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모른다 라고 하시는 것인가? 결국 이 사람들은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신 적도 없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적도 없고, 죄사함을 받은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를
시인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자들이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날마다 교회 공동체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 분은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종의 형체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8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삼위일체의 사상을 믿는다.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14장 19절「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가복음 6장 40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누가복음
9장 16절「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톤 우라논)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열두해 혈루병으로 고통을 받던
여인이 병에서 벗어나며,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고, 손마른
자, 중풍병자, 나병환자를 고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가르치다가 저녁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날이 저무는데, 저들에게 뭣이라도 먹게 해야되지 않느냐면서 여쭐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 중 하나(빌립)가『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응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신 분이었는데, 빌립은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백 데나리온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 믿음이 자신과 하나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곳에 왔던 사람들에게 인식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저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표면적인 사건으로서 제자들의
믿음 약한 것과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끝나면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6장 38절에서『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그런데, 요한복음 6장 9절에서는『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이와 보리떡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이는
율법에 갇혀 있어서, 천국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를 상징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에 갇혀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말이다. 물고기 두마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온 첫사람 아담, 그리고 율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마지막 사람 예수님이신 것이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율법이라는 아이로부터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께로 넘어오게 된다. 이 말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복음이 되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죄인이 대속의 어린양의 죽음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인들은 죄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게 약속의 씨에 대한 열매맺는 것이다. 씨로 있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지만, 씨가 죽으면(십자가의 죽음) 생명의 열매(부활)를 맺는 것이다.
아이로부터 받은 오병이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복으로 내려온다.
죽어야 할 육을 일시적으로 살리는 떡 대신에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떡(부활)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아이로부터 받은 오병이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복(생명의
부활)로 다가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마가복음 6장 43-44절에서『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떡을 먹은 남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를 상징한다. 천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천년왕국이라고 했을 때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오(5)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
분을 따랐으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또한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한다. 계속 열두 제자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함을 말해준다. 열두 제자이지만, 이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13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호 우라노이스)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하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아버지, 또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가 심는 것은 말씀이다. 구약시대는 율법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아니라, 인간들이 전통으로 만든 것은 다 뽑힐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이를 본 바리새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에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전통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했다.
이스라엘은 사막지대인데다가 바람이 많고
또 건조하여 먼지가 많이 날려서 몸을 씻어야 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정결한 몸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함에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손을 씻는 것으로 마음이 정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열심히 손을 씻는 만큼 마음은 정결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
그들이 전통으로 계명을 어긴 구체적인 예는
고르반이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이란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미명 아래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은 것이다. 『고르반』 하고 선언하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제 1-4계명을
기초로 하나님을 어느 것보다 더 사랑하고 경외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르반을 이용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을 어겼다. 그들은 부모님을 섬기고 싶지
않으면 고르반 하여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부모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하물며 반드시 갚아야 할 돈도
고르반 해놓고 갚지 않았다.
그들의 문제는 외식이었다. 외식이란 연극 용어로, 배우나 광대란 뜻이다. 배우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여 작중 인물역할을 한다. 즉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일컫는 용어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면 장로들의 전통을 좇아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씻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내면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말을
더 가르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씻지만
마음에는 온갖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가식적인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시 불러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바리새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타협하거나 상종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제자들이 아직 분별력이
없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구덩이에 빠뜨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만든 교리다. 이 교리는 성경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성경의 내용과 다른 것이 많이 있으며, 전혀 성경과 다르게 해석한
것도 있다. 이외에도 교회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만든 규칙이나, 절기가
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장로나 권사의 직책에 임명되면 은밀히 자행되는 관행이라든가, 전통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리는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7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호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빌립보 가이사랴는 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인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곳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에게
아들이 여럿이었는데, 그 중 하나인 헤롯 빌립이다. 그가 그곳에 도시를 만들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가이사를 따서 가이사랴라고 하고, 자기 이름도 집어넣어서 가이사랴 빌립보 라고 이름을 지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 황제의 칭호가
붙었다는 말은, 이 가이사랴 빌립보가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웅장한 모습을 갖춘 도시였으며, 황제를 위한 신전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로마 황제의 도시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온 것이다. 예수님과 또 갈릴리 시골사람이 대부분인 제자들은 이런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황제의
도시, 화려하고 엄청난 로마의 영광을 자랑하는 이 도시에 제자들과 함께
오신 것이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훈련을 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예수님이『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제자들이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언급한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선지자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들과 가르친 말씀의 내용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선지자라고 생각했지 메시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라는 기치 아래 정복
전쟁을 펼쳤다. 무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로마가 추구하던 것은 강한
힘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대단한 믿음의 말이다. 이것을 알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구원과 직결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말했음에도, 베드로가 사탄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28-32절『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항상
함께 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긴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특히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전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른다. 사탄이
넘어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돌이켜서 형제들을 굳게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물 위로
걸었다. 다른 제자들은 보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 만을
바라보게 되면, 에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또
하나 발견한 것은 이 육신으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풍랑을 바라보는 순간 물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육은 어느 순간『믿음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삼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셨다.『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사탄이 욥에게 하였듯이 베드로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그 때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심하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부인했다. 철저히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는 베드로였음을 나타낸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 육적인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은 것처럼, 모든 신도들도, 세례받은 후에 사탄의 시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도의 마음에는 육의 마음과 영의 마음이 있으며, 육의 마음은 넘어지게 하는 마음이고, 영의 마음은 세워주는 마음이다. 성령이 주는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다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9절「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톤
우라논)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8장 18-19절「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엔
우라노)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엔
우라노)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6장 19절은 문법적으로 복수의 하늘이고, 성도의 심령 속의 천국을 의미한다. 18장 18-19절은 단수의 하늘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점차적으로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 확산되는 것을 보여준다.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늘에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주셨다. 땅을 상징하는 세상의 권세는 사탄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속하여 죽으시므로 그와 연합되는 자도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죽은 성도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천국의 열쇠는 바로 복음과 같은 의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땅에서 푸는 것이고, 부활은 하늘에서 푸는 것이다. 신도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땅에서 매인 자가 되는
것이고, 부활과 연합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매인 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는데도, 이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매여있는 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은 죽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믿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고 예수의 피를 요구한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부활에 대해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죽고
영이 영의 몸을 입고 살아는 것인데, 이를 믿지 않고, 또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자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매여있는 자들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역자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9-36절「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톤 우라논)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가복음 13장 25절「별들이 하늘(투 우라누)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가복음 14장 6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투 우라누)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가복음
13장 27절「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헤오스 우라누)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가복음 13장
32절「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엔 우라노)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6장 6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투
우라누)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가복음 14장 6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투
우라누)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 날과 그때는 종말 때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는 그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에 예수님이 임재하는 그 때를 의미한다. 성도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믿어도, 곧 바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으라고 훅 불어넣어 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종말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다 알게오신다. 예수님이 심판자로서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은 택한 자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오시는 것이다. 하늘의 징조라는 것은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예수님이 심령 속의 재림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그 상황을 노아의 때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그러나 무화과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은 극히 적은 수만 그렇게 되고, 모두 열매없는 빈가지만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노아의 때, 노아는 120년간
회개를 외쳤지만, 그 가족 일곱 명만 구원받았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재림하실 때 메시야 왕국(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성경에서는 이를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예수님이 직접 성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천국이며, 셋째 하늘이며, 에덴의 회복인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9절「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톤 우라논)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누가복음 2장 15절「천사들이 떠나 하늘(톤 우라논)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톤 우라논은 하늘 나라(천국)로서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과 같은 개념이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엪우라노이스)에 앉히시니」
따라서 하늘로 번역된 톤 우라논(엪
우라노이스)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며, 성도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가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함을 믿을 때, 그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천사가
하늘로 올려지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제자들의 눈을 통해서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천사는 하나님 우편에 있지만,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권능이 시작되는 하나님 왕국의 일체됨을 나타낸다.
하나님 나라는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연결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부하나님을 첫째 하늘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이를 둘째 하늘로 볼 수
있으며, 성도는 셋째 하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성령으로 연결된 통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하늘에 대해서, 보좌에 계신 성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셋째하늘은 에덴동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하늘은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33절「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 20절「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엔
우라노)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누가복음은 문법적으로 복수 하늘이고, 마태복음은 단수 하늘이다. 복수하늘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고, 단수 하늘은 성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제목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구약에서『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멸하여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짐승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몸을 드리는 것은 몸이
하나님 앞에서 멸하여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구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 중 태워지지 않은 것은『연보』라는 창고에 보관하여 구별하였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태우는 것, 즉 죽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의 그림자인 것이다. 십일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뜻이 들어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 중 불에 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사장 등 레위지파 사람들이나, 고아나 과부 등을
위하여 쓰이게 된 것이다.『바친다』라는 말은 구약의 마지막에 끝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개념은 끝난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영이다. 헌금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을 드리는 것은 곧 내가 예수와 더불어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인 것이다. 영적
예배는 눈에 보이는 소유물 대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보화 즉 부활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하늘의 보화는 부활생명이다.
죽었던 영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된다. 사람은 영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체로 비롯된 것은 허무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장 51절「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톤 우라논)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천국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창세기 28장 12-19절에서 야곱이 같은 체험을 한다. 28장 12절에서『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야곱은 자신이 누워서 잔 곳이 하늘의 집(벧엘)이라고 표현했다.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올라갔다는 말이다. 이 말이 요한복음 1장 51절과 연계되려면 사닥다리가 인자라는 의미가 된다.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즉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 연결되는 고리인 것이다.
야곱이 꿈을 꾼 사닥다리는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을 상징한다. 그를 통해서 범죄한 천사들의 영이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만들어진 남녀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만들어주고,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인자 위에 하늘 문이 열려있어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하늘 문이 열려져 있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 된다.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여 하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천사들의 영들이 그리스도(첫사람)를 통해서 세상으로 내려가고, 그리스도(마지막 사람)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간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서『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프로토스 무 엔)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여기서 프로토스는 질서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한다. 나보다 먼저 된 자라는 말은 아르케(우두머리)라는 말이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존재했던 분이라는 말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영어성경(kjv)은 『Who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f every creature:』헬라어 성경은 ὅς ἐστιν 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τοῦ ἀοράτου, πρωτότοκος(프로토토코스:첫번째
태어난) πάσης κτίσεως(크리세오스:창조된),죄의 몸을 만들어서 악한 천사의 영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말의 헬라어를 보면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그 아들 그 사람)이다. 그 아들과 그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이다.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내려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첫사람 아담이기도 하고 마지막 아담이기도
하다. 번역을 다시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곧 그 아들
그 사람(그리스도)이며 하늘에서 내려옴이 없었다면 올라감도
없었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첫사람 아담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셔서 죄의 몸을 영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다시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 내려와서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죽는 모든 사람은 첫사람 아담 안에 있는 자이고, 새생명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생령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ψυχὴν(프슈켄)ζῶσαν(조산)으로서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말이다. 첫사람 아담은 생명체인데 죄의 몸을 나누어 주었다. 즉 첫사람 아담으로 부터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로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의 몸이 죽고 하늘로 부터 새로운 생명(영의 몸)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몸이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9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표면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올라가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갔음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면상으로는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분과 올라가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베소서 4장 10절에서『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창세기 2장 1절에서
만물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범죄한 천사들)를 의미하는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구원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신 그리스도는 첫사람 아담으로서 죄의 몸을 영들에게 주기 위해, 마지막 아담으로서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구원받는 영들에게 영의 몸을 주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다.
히브리서 1장 6절에서 한글개역 개정은『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그런데, 헬라어를 보면 ὅταν δὲ πάλιν εἰσαγάγῃ τὸν πρωτότοκον εἰς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λέγει·καὶ προσκυνησάτωσαν αὐτῷ πάντες ἄγγελοι θεοῦ.밑줄친 부분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그분께서 그 처음 나신 분을 다시 세상에 들어오게 하실 때에』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 처음나신 분은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이고, 세상에 다시 들어오는 자는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인 것이다.
(단수 하늘)
마태복음 5장
34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토
우라노)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태복음 23장 22절「또 하늘(토
우라논)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맹세에 대해서 『지키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으며, 만약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키라고 명했다. 그런데 민수기(30:3-16) 에서 『미혼여자의 서약은 아버지가, 아내의 서약은
남편이 그 유효성 즉 준행할 의무 여부를 최종 결정하여 취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율법은 인간의 판단
착오나 어리석음으로 맹세를 잘못하게 되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레위기 5장 4-6절에서『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구약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 봐도
합당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하지 말라고 했으며, 심지어
악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맹세
자체를 무조건 금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위선적 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에게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악용하는 잘못된 습관을 당장 그만 두라는 뜻이었다.
마태복음
23장 16-22절에서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호 우라노)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맹세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셨다. 그들은 금과 예물(성전에
바칠 헌물)을 걸고 맹세한 것은 꼭 지키되, 성전과 제단에다
대고 말로서 한 맹세는 꼭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금보다 성전이, 예물보다 제단이, 성전과 제단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모든 맹세는, 돈을 걸었든 말로만 서약했든, 결국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맹세라도 최선을
다해 지켜야지 맹세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하늘(호
우라노)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말한다. 어떤 맹세라도 모두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유대 랍비들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두 번 이상 같은 대답을 하면 맹세라고 간주했다. 맹세란 하나님께 자원하여 무엇을 드리려 서약하든지, 사람들 사이에
계약을 지키려는 보증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약속을 잘 지키겠다는 결의를 내비치는 행위이다. 계명이나, 서원이나, 약속이나, 계약이든 간에 진정성과 성실성을 갖고 대답을 했다면 맹세인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말로든 물건이든 보증할 필요 없이 무슨 약속이든 성실히 지키기만 하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맹세에
대해 가르치는 근본 의미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만 거창한 대상이나 물건을 동원해
맹세하는 것은 상대를 속이려는 잘못된 의도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3-45절「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엔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원수가 된다. 그 이유는 죄인 속에 있는
천사의 영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회개하게 하여 구원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어떻게 온전할 수 있는가?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으며, 온전하지 못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내가 원수를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거듭난 몸으로 바뀌어야만 되는 일이다.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박해하는 자를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영의 구원때문이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거듭남은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주신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히는 삶을 갈 뿐인 것이다. 그리고 죄악과 싸워 피흘려 승리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영의 구원을 위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악한 천사의 영들을 물질세계에 두었다.『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서1:6),『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베드로후서 2:4)
바로 영을 가둔 곳이 흙속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된 것이다. 흙속에 갇힌 영은 죽어버렸으며, 육체로 비롯된 마음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인간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사건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 살아나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영에 대해서 설명하신다.『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그러나 육체 속의 영은 다 죽어버렸다. 왜냐하면 영은
흙속에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방법을 알려주셨다.『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대화할 때, 요한복음 3장 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물은 몸의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흙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영이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인간은 악으로 오염된 영이 갇힌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악인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게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악인임을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 그 약속은『현재의 죄악된 몸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못박힌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이다. 이게 세례의식이다.『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6:4)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뀐 것을 믿는 것이다. 신령한 몸으로 태어나게 되면 영이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나라의 옷을 다시 입게된다. 사도바울은 옷을 몸으로 표현했다.『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4) 그는 몸을 집으로도 표현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 육체가 죽으면 하나님나라로 들어가 천사와 같이 된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태복음 22:30) 그러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된다.
마태복음 7장 9-11절「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토이스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13절「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엨크 우라누)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복수 하늘,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단수 하늘로 사용되었다. 복수 하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누가는 장차 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마태는 지금 현재 임할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성도가
구하는 것인 임마누엘 신앙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성령을 구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다.
성령세례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보혜사)내주하며,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성도가 복음을 전할 때나 삶에서, 성령(또 다른 보혜사)이 힘을 주고, 도우며, 기억나게 하시고,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도의 옆에서 활동하신다. 그리고 성령이 떠나가기도 한다.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떠나가지 않으신다. 보증으로 성도를
구원받은 자로 인증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4-11절에서『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네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니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해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다.
마태복음 11장 23절「가버나움아 네가 하늘(헤오스 우라누)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누가복음 10장
15절「가버나움아 네가 하늘(헤오스 우라누)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벳세다에 대해서 심판의
말씀을 경고로 하셨다. 두 지역은 예수님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고향에서
예수님이 배척당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무시했다. 무시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마가복음 6장 3-6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배척하다 라는 헬라어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는 장애물에 걸려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그 분(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장애물은 육적 눈이다.그들이 예수님의 육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에다우마젠』이라는 단어인데, 마가복음 5장 20절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은 후에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을 전하였을 때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라고 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길 뿐,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데가볼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겼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도 앞으로 직접 전도 사역을 감당할 때에 이런 배척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고향 나사렛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촌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 주변의 모든 마을을 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셨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태복음
12장 50절「누구든지 하늘(엔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8장 14절「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엔
우라노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이 세상(땅)과 대비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에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아들이 되셔서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하나님이 스스로 아들이 되신 이유는 아들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계시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도 역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라고 부른다. 만일
신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이미 그는 다른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는 죄인들을 하나님 아들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간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천국)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3절「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투
우라누)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호 우라노스)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호 우라노스)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가복음 8장 11절「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투 우라누)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누가복음 11장 16절「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우라누)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여기에서,
호 우라노(우라노스)는 공중의 하늘(sky)에 해당된다. 표적이라는 것은 그 어떤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뜻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은 회개하는 자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다가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고 배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사경을
헤매면서 뱃사람들은 하나의 지혜를 짜냈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는 것이다.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걸렸다.
그때에서야 요나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그는 바다에 빠뜨려졌다. 그래서 거치른 풍랑은 즉시로 멈췄다. 깊은 물에 빠진 요나,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지냈다.
그 뱃속에서 요나는 크게 회개했다. 그래서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냈으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고하며 회개를 외쳤다. 그런데,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크게 회개했다.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야말로 대각성의
회개가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장차 무덤에서 일어나실 주님의 부활처럼,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지
못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는 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마태복음
18장 10절「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엔
우라노이스)에서 하늘(엔
우라노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 라고 다투는 것을 두고 어린아이의 예화를 말씀하셨다. 어리다는
말은 작은 자를 의미하며, 크지 않다는 말과 통한다. 어른들
처럼 서로 상대방보다 높거나 크게 되기 위해서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상대적으로
높고 큰 그런 자가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31절에서『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깨닫는 자들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세상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심에도 “누가 크냐” 라고 논쟁을 벌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가복음 9장 37절에서『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그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영접한다고 표현했으며, 심지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한다고 까지 말씀하셨다. 또한 어린아이는 믿음에서 실족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장 14절에서는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고 한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도대체 어린아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부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와 같이 신도 역시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천국이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천국은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곧 심령 속의
성전(포도원 비유)이다.
첫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성전을 의미한다. 첫사람은 그의 몸에서 갈비뼈가 분리되므로, 남자(아담)와 여자(하와)로 분리되어져, 죄의 몸이 된 것이다. 분리된다는 것은 죄를 상징한다. 그리고 죄의 몸에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담겨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어린아이를 통해서 첫사람의 성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심령 속 성전이 첫사람의 성전으로 되기 위해서는 옛성전은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성전이
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영접하는
자의 심령 속에도 첫사람(그리스도)성전이 세워져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는 믿음에서 실족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 신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부활하신 예수와 연합하여
현재적으로 부활됨을 믿지만, 이를 전하면, 핍박받을 것이다. 핍박받으면 마음의 고통이 심하다. 아직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성도 역시 예수와 연합하여
죽어야 하는데,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날마다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영적으로 어린아이, 작은 자라고 하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로 여기신다는 말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
천사는 원래 하나님을 보좌하는 자들이나, 악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육체 속에 가두어
인간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여, 돌이킬 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부활이다. 비록 육체는 세상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영은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5절「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엑크 우라누)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가복음 11장 30-31절「요한의 세례가 하늘(엑크 우라누)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우라누)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이 질문은 바로 앞에 21장 23-24절의
질문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하는 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셨다는 말이다.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세상에 온 자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를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심령
속에 성전을 두시고, 하나님은 나가셨는데,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않고, 오히려 세를 받으러 오는 자를 능욕하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비유하면서 버린 돌이 건축자들의 모퉁이 돌로
되었다고 말을 한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버린 돌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받아 흩어져 버렸다. 열매는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의 열매를 맺는 자들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지만, 예수를 받아드리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던져저 깨지는 돌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9절「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호
우라노이스)에 계신 이시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즉 세상이라는 이 땅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관리권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보면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범죄한 천사의 영이 갇힌 곳이 이 땅이라는 말이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심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심판이며, 이미 심판받은
자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나라에 앉히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심판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심판자가 되신다.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들어서면,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장차 육체가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육체가 살아있을 때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강도가 죄우편에 있었는데, 우편 강도는 예수님께 간절히 자신을 구원하시기를
원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2-43절「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우편 강도가 죽기 전에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그 날 이루어진 것이다.
낙원이라는 말은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곧 잃어버린 에덴을 의미하며, 사도바울이 말하는 셋째
하늘이 된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과 동시에 낙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살아있는 동안 범죄한 천사의
영들이 만들어 놓은 선악 지식나무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가끔 걸리는 바이러스와 같이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우울증과 같이 성도의 마음을 휘청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약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바로 성령을 통해서 치유하라는
것이다. 성령의 빛 만이 이것을 치료할 수 있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이 선악지식나무의 열매는 세상 속에 있는 성도에게 다가가 그 열매를 따 먹으라고 유혹한다. 만일
ㅅ겅도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떠 먹어버리면, 엄청난 사탄의 가시가 기다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5장 1-5절『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토 프뉴마티)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투 에무 프뉴마토스)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사르코스)은 멸하고 영(토 프뉴마)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함이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음행한 자를 내쫒으라는 것이 바울의 말이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권면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음행한 자를 내쫒기는 커녕 교만스러운 당당함과 오만한 허풍만 가득했을 뿐이다. 음행한 자가 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에게는 사탄이 기다리고 있다. 사탄의 가시가 육신을 멸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2절「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엑크
우라누)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하늘은 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데, 천사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천사는
영으로 되어 있는데, 세상에 왔다는 말은 그가 몸을 입고 왔다는 말이다. 그의 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신비한 몸을 입은 것처럼 천사들도
영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0장 35-36절에서"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30절"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한다. 천사는 영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5-38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장래의 형체를 뿌린다는 것이다. 나중에 씨가
열매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씨껍질이 죽고(사라지고) 그 속에 있는 씨눈이 자라서 다른 형체로 바뀌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엔 아프타르시야) 살아나며(에게이레타이)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엔
아프타르시야(ἐν φθορᾷ)는 영생 안에서, 에게이레타이(ἐγείρεται)는 일어난다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다시 살아난다 라고 번역하므로 마치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다. 신령한 몸이라고 번역된 소마 프뉴마티콘은 영의 몸이다.
부활은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하이마)과 육(사륵스)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처럼
수많은 성경 귀절을 통해서 영적 부활임을 말해주고 있다. 부활을 정리해보면, 육체 속에 갇힌 영이 죽었는데, 영이 죽은 자 기운데서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육체적 부모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몸(영의 몸)을 입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사들의 모습은 그들을 대면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천사들을 만날 때 천사들의 첫 마디는 주로 “두려워 말라”였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주의 천사를 목격했을 때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마태복음 28:4).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들판의 목자들은 주의 천사가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천사들을 두루 비추자 크게 무서워했다.
다니엘 10장 5-6절에서,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마태복음 28장 3절에서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들도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거듭난 성도 역시 새 피조물로서,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존재인데, 육체로 인해서 영적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이와 같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육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성도는 자신의 영의 몸을 바라볼 수 없다. 그 영의 몸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환상을 볼때도 있는데, 이는
영의 눈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천사를 볼 때, 이는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영적 눈을 뜨게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8절「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엔
우라노)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통일하려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에베소서1장22-23절에서『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교회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성전이 있으며,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체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만물을 영적으로 충만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2장8절에서『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시편8편5-6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복종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아직은 만물 속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만물 위 교회의 머리와 만물 안에 교회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해 그의 군대가 되어야 함을 말씀해 주신다. 이기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만물의 복종됨을 보지 못하는 것은 군대됨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천사의 영으로 인하여 시작되었으며, 그들을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3절「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의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종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와 땅에 있는
군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영)과 이 땅에서의 군대(범죄한 영)가
다 배치가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일곱째 날,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는 말은 하늘의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씀이다. 일곱째 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날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안식이 된다는 말이다. 육일 창조를 생각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안식은 하나님이 물질세계에 있는 영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약속의 씨를 두신 것이다. 씨를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 나라로 복귀할 때, 그 또한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가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회개하여
죽은 자같이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탕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영들을 말한다. 그러나 회개하여 죽은 자 같이 되어 돌아가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장사지낸바 되었을 때, 영의 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는 안식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의 군대는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 안식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안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그 안식일을 통해서 백성들이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 자체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므로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장래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으면 그것이 안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안식을
주겠다고 표현이시다. 첫째를 포함해서 여섯째 날은 세상에 대한 날이다. 사람의 일이 끝나는 날이 여섯째 날이 된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안식하는
것이다. 안식이 왔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안식에 있으며, 만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51-55절「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투 우라누)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받은 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멸하는 심판의 권세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었다. 심판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에게만 위임하신 것이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온 예수님 일행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절기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무리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사람들을 미리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보내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사마리아 땅이 아닌 요단 동편의 베뢰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거할 숙소와 식사 준비를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많아
그들을 피해 조용한 사마리아 길을 택했지만 그 곳에서도 거절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예수님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거절한 아주 모욕적이고 적대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분노한 우레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전날 만났던 갈멜산의
엘리야를 연상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는데, 제자들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과 칼, 피와 살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시며
가르치고 계셨다.
누가복음 9장 57-62절「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첫 번째,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지금 당장에 따르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길인지 알려주신다. 집도 머리 둘 곳도 없는 주님을 따르는 것은 확고한 결단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임을 상기시키시고, 주님을 따르지만 가족과 마지막을 보낼 시간을 달라는 자에게는 세상에 미련을
두는 자는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곧 떠나게 될 것이라는 책망을 하셨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는 주저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유혹을 피하고 어떤 핑계대거나 변명하지 말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장 1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투 우라누)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늘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한다.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사탄에게 사라진다는 의미가 된다. 칠십인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끝내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그들은 모두 다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것은 "주의 이름" 앞에서 귀신들도 꼼짝 못하고 항복하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만 보였던 귀신들이 자기네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당장 도망쳐 버리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들이 그처럼 신이 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쁜 보고를 들으셨을 때『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나도 보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칠십인들의 전도활동에 의하여 사탄이 곳곳에서
패배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의미다.
칠십인의 전도활동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시골 동네들을 돌아다니며 몇 마디 말을 전하고 몇 사람 병 고쳐 주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그들의 전도는 사탄을 곳곳에서 격퇴시키는 엄청난 승리였다고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번개가 땅에 떨어지는』것처럼 사단이 급속도로 추락하게 되는, 실로
압도적이고도 명백한 승리였던 것을 말해주신다.
그 제자들의 기쁨에 그렇게 공감해 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도록 상기시켜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여기『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말은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얻게
된다.』는 말과 비유적으로 이어진다. 즉 귀신을 쫓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수의 힘을 압도할 권세를 주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결코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지배 권세를
사탄에게 주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사탄의 권세가 예수님에게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탄의 권세에서
예수님에게로 전환되므로, 사탄이 고소할 권한이 없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서 성령의 법으로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한복음 6장 50-51절「이는 하늘(투 우라누)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투 우라누)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투 우라누는 단수 하늘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부활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이 부활생명이 성도의 심령 속으로 전해지면, 성도가 살아있는 동안에
영생의 몸을 가진 것이 된다. 육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난
영이 영의 몸을 입고 하늘에 앉히신바 되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주린 배를 채운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수소문하여 가버나움까지 배를 타고 뒤쫒아 왔다. 이들에게는 먹는 것이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여서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접근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속마음의 의도를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았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주린 사람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다. 또 풍랑과 바람을 잔잔케 하시며 물위를 걸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처한 형편과 상황을 불쌍히
여기셨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하셨다. 고통 속에 매여 있는 그들을 낫게 하고 자유롭게 해 주시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보면서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이런 현실의 문제에 계속 매여서 영생하는 하늘의 양식을 찾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세상에 속한 썩어져 없어질 것들을 찾다가 주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푸신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두려움과 염려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부활생명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찾아 온 것임을 아셨다. 그들은 또
다시 표적과 기적을 바라고 한번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육신의 양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찾아왔다. 예수님은
양식의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의 육의 양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들이 땅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결코
주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영생을 주시는 자시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위해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이
말씀에 무리들은 예수님께 다시 되묻는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 외에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몰랐다. 백성들이 질문한 하나님의
일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복수로 표현되었다.『어떤 일들을 해야 영생을 얻는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많은 일들이 필요합니까?』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어져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부활영생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일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늘의 부활생명을 주는 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내신
분으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죄에서 건지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은 다시 질문을 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떤 표적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모세는 40년간을
만나를 내리도록 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였는데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큰 표적을 볼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이들은 만나의 기적 또한 육신의 양식이 해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문제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영의 양식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참 만나인 부활생명의
떡이므로 자신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육체는 썩어 땅에 묻힌다. 그러나 영은 구원을 얻어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 부활 영생하라는 것이다.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8절「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투 우라누)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육체로 오셔서 그의 이름을 예수라 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이시다. 요한복음 17장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아들의 이름으로』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성령의 이름으로』성령도 이름이 있는가? 성령은 영으로서, 히브리어는 루아흐, 헬라어는 프뉴마, 영어는 (홀리)스피릿, 한글은 성령으로 불린다. 요한복음
14장 16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따라서 성령의 이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고
말을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없는 세례는 온전한 세례가 아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십자에서 죽으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
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어 죽은 자임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의식인 것이다.
Ⅱ. 시대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
1. 율법시대 이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의미
(1) 첫사람의 심령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첫사람과 마지막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과의 관계에 있어서,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번역하면『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첫번째 나신 분(초태생)』이 된다. 첫사람은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형상은 모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세상에 태어난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대속의 죽음을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최초의 그리스도인
첫사람은 죄의 몸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첫사람이 만들어진 배경은 창세기 2장 7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이 되니라.』 네페쉬는 영어로
soul로서, 살아있는 생명(한정된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로는 죄의 몸을 하고 있다. 다음 세대에 죄의 몸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
메시야가 출현하여, 죄를 대속하므로 죄의 몸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죄로 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첫사람의 심령 속에는 성전이 세워졌으며,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후에 성전을 통해서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이다. 회개하여 약속된 여인의 후손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 대로”에서 형상은 육으로는 죄의 몸을 하고, 심령 속에는 성전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는 남자와 여자의 심령 속의 성전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죄의 몸에 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전에는 자기가
앉아있는 모양이다. 포도원(성전)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하나님)가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로 세상에 창조된 사람들의
성전에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사람과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이다. 첫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처럼) 만들었으며 자기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창조하시는 내용이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첫사람(그리스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졌는데, 이 형상을
따라 우리(성부와 그리스도)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이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자는 표현이 된다. 첫사람과 남자와 여자의 형상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의 차이가 된다. 첫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이후의 사람에게는 성전에 자기가 앉아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방법을 창세기 2장
21-22절에서 설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첫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담(사람)이지만, 남자는 이름이 아담이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였다. 개역개정이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아담이라고 하므로, 남자인 아담과
중복되는 혼란을 주는 것이다.
첫사람으로부터 갈비뼈를 빼어서 여자를 만든 것은 결국 남자와 여자로 분리,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7절에 의하면, 첫사람이 창조되었고, 잠이 든 순간 사라졌고,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가 이어서 창조된
것이다. 잠이 든 첫사람은 사라지고, 눈을 뜬 남자(이름 아담)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고 난 뒤부터 심령 속의 하나님의 형상인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
성전에 자기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옛성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가신 후에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니므롯과 같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범죄한 천사로 시작하여, 인간이 된 후에 나타난 자기 형상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일곱의
가족을 제외하고 물로 심판하셨다.
오늘날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그 성전에
하나님은 없고, 자기가 우상처럼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자기의 형상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자기의 형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육적
자아)이 그 성전에 앉아있는 것이다. 첫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자기의 형상은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교회 신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거룩한 품성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타락하므로 형상이 사라졌지만,
이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으로 인해서 형상을 잊어버렸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 라고 말을 한다면 이는 영지주의에 가까운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함께 자기라는 옛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심령
속의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2)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
마가복음 12장 1-5절에서『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휘테오)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게오르고스)에게 세로 주고(에크디도미)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 때가 이르매(토 카이로)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아티마조)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악한 농부의 이야기이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축복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12장 12절에서는『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새로운 성전(부활)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냐 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라고 묻는다. 종교지도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침묵 속에는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하늘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포도원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다.
표면적인 비유를 통해서 이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집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도원은
집이라는 개념이 된다. 집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았는데, 성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즉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헬라어 휘테오는 심다라는 의미다. 성전(옛사람:돌성전)을 심령 속에 심은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농부들에게 세를 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에크디도미는 빌려주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어놓았는데,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은 세를 통해서 넘겨받은 포도원이다. 게오르고스는
농부로 표현되었지만, 땅을 경작하는 자이다. 심령 속의 밭을
경작하는 것이다. 굳었던 땅을 갈고 옥토를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성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농부이나 땅을 갈지 않은 그런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부가 땅을 경작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주인으로 부터세를 받았으니, 농부가 주인에게 열매를 바쳐야 한다. 열매는 심령 속의 성전을 통해서 영생(그리스도)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세를 물려받은 성도 역시 농부라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아포데메오는 집밖으로
나가다, 외국을 나가다 라는 의미다. 집은 성전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심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성전 밖에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그의 영을 흙에 가두어 분리되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밖에 계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있음에도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를 준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주여 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가셨던 집주인이 때가 되면 찾아오신다.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러 종을 보내시는 것이다. 토 카이로(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이
심령 속으로 들어오면 성도가 카이로스(영생)가 되지만, 하나님이 밖에 있으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크로노스가 된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니』에서, 가지에서 열매(그리스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영생의 열매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자가 안식에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이신 그리스도로 열매를 맺으므로, 이제 십일조가 완성이 된 것이다. 십일조는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내고, 그것을 통해서 전체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전체가 다 완성이 된 이후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말은 열매(영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된다. 세를 받은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성령)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그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사야 5장
1-3절에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사야 5장 7절에서는『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자기의 의에 도취해서 그리스도를 오히려 십자가에 죽게 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보낼 것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심령 속에 한 선지자를 보내주는데,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때리고 돌려보냈고, 다른 종도 때리고 능욕하고(아티마조) 돌려보냈다. 아티마조는
불명예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기 전에 종들을 보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상징한다. 이 종들(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나타난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선지자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므로 때리고 능욕하는 것이다.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그런데, 누가복음 20장 12절에서는『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세번째 종에서, 삼(3)이하는 의미는 완전한 것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의 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날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33-34절에서『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제사장
그룹,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며, 결국 죽이기까지
했다. 이 말에서, 오늘날 교회 신도가 볼 때 분노스럽지만, 신도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을 때는 의아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은
심령 속에 성전(옛성전)을 세워 세를 주고 갔지만,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해도 그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능욕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교회라는 건물에 모여서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지경에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6절에서『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이 말과 누가복음 20장
13절에서『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티 포이에오)』개역개정에는 “어찌될까” 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 보면 “어떻게 완성하지” 라는 것이다. 포이에오는 완성하다,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포도원을 심었는데, 즉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심었는데, 어떻게 이를 완성하지 라는
말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어서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 줄까 라는 고민이 섞여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하기 위해서는 농부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죽을 줄 알면서 보내는 것이다. “존대한다(엔트레포)”는 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이 회개이다. 심령 속에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회심하는 자요,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7-9절에서,『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클레로노모스)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논의하고 분석해보니, 이 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결론내리는 것이다. 클레로노모스는 클레로스(제비뽑기)와 노모스(율법)의 합성어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율법을 통해서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성전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에서, 와서(에르코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악한 농부)가 진멸당하고 영적인 자아(다른 사람)가 살아나면 포도원(새성전)을
주는 것이다. 진멸당하는 것은 옛성전의 파괴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육적 자아)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진멸당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지고, 새성전(새사람: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원(옛성전:옛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도원(새성전:세사람)을 넘겨주는 것이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영적 자아)에게 주는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육신이 죽고, 영의 몸을 입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성새전(지성소)이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일이 된다.
요한복음 16장 7-8절에서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악한 농부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육적 자아가 성전을 장사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 죄이고,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 자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의가 되며, 그래서 육적 자아(악한 농부)가
심판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할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때(진멸당할 때), 새사람으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포도원이 된다.
(3) 희생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제사와 만날 수 없는
제사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신다. 가인은 자기의 것을 드리는 제사이고, 아벨은 자기를 드리는 제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인은 세상의
죄인의 모습이고, 아벨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그 죄를 깨닫기를 원하시고, 구원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자가 되었지만, 결국 세상의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가 되고, 예수는 희생양이
되는 관계를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죄인이 깨닫고, 그의
죽음과 연합될 때, 하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것이다.
창세기 4장 2-5절『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의 모습을 나타낸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땅의 것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뱀(사탄)의 자식인 것이다.『세월이 지난 후에』미캐츠(기본형 캐츠מִקֵּ֣ץ)는 끝(종말)이라는 의미이다. 종말은
심판을 의미한다.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미프리 아다마) 열매는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와 생명나무가 있다. 가인이 드린 열매는
자기가 내 놓는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인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라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이 말은 가인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오신 그 때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동물만 드린 것이 아니고, 곡식도 드렸다. 그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이제는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제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하는데,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자는 죽어야 하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인, 즉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의 의를 나타내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없이도,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다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돌아오라는
것인데, 아무도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인 즉
이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가인과 같은 그런 존재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첫 새끼는 장자다. 장자 역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시편 89편 27절에서『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로마서 8장 29절에서『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리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첫새끼를 드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장 26절에서도『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세상 끝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기름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하시고, 기름은 태워서, 피는 땅에 흘려서 보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다른 생명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레위기 3장 17절에서『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레위기 7장 11장 22-25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인간들이 먹어야 할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생명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하늘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살과 피를 드리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드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희생, 봉사, 재물 등 이 세상에서의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드리는 것이다. 곧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나를 드리는 것이다.『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이 말은 물질을 구분해서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온 영을 다시 하나님께로 드린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을 드린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온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제물은 이스라엘이 버린 과부, 귀신들린
자, 맹인, 죄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는 자기의 의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드리는 자의 제물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 생각 속에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2. 율법시대 성전을 통한
하나님 나라
히브리서 9장 1-5절『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지성소의 궤 위와 이스라엘 진영에 있었던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와 축복의 표시였다. (레위기 16:2; 민수기 10:33-36)
또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셨다』고 말하는데, 이 그룹들은 궤의 덮개에
있었던 두 그룹을 가리킨다. (사무엘상 4:4; 시편 80:1)
따라서 그 그룹들은 여호와의 『병거의 표상』이었다. (역대기상 28:18) 언약궤에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므로, 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후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시온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시편 9:11), 이스라엘은 이 언약궤를 전쟁 중에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성소마당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번제단에서 희생동물이 죽는다. 그리고
물두멍에서 제사장이 손을 씻고, 성소로 들어가는데, 성소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다. 등잔대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세상의 빛이 된다. 진설병은 성경 말씀이다. 즉
성도가 말씀대로 살아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향단이 성소에 있는데,
히브리서에는 향단이 지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향로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되는 관계를 맺는 행위를 의미한다. 지성소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언약궤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지성소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구약시대
초기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없었다. 성소인 것이다. 그래서
향로의 위치가 문제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후에, 휘장이 쳐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향로가 성소에 놓이게 되었다. 제사장은 항상 향로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변경된 것이다. 원래 향로는 지성소 쪽에 있던 것이었다.
성소에서
하는 행위는 말씀을 먹고, 촛대의 불처럼 세상의 빛이 되는 자가,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즉 성소를 거쳐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도는 프로슈케(관상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백성들의 죄를 상징하는 희생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성전의 성소개념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첫째날에서 일곱째 날까지 표현을 하면, 빛, 궁창, 뭍(씨), 마오르, 새(바다), 짐승(사람), 안식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성소의 용어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연결하여 적용할 수 있다.
첫째 날, 빛은 번제단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5절(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장 9절(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29절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번제단에서 어린양이 죽는다.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게 된다. 절기로는 유월절과 관계된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해서 출애굽이 시작된다. 요한계시록 1장의 내용이
여기에 해당된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시를 통해서
속히 될 것(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옛성전이 무너지고, 성도에게는
새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출애굽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계시는 세가지의 측면에서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 첫째, 창세기(1-3장)의 측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갇혀있는 자라는 것이다. 천지창조 7일을 보면 흑암에 갇혀 있는 자에게 빛이 들어오고, 말씀(바다)이 들어오고, 생명의 꽃을 피우고, 흑암에 있던 자가 빛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 안식을 하게 되는 모습이다. 둘째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한 출애굽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역사와 옛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세번째는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성전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연결되고 조화될 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들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둘째 날, 궁창은 물두멍이다. 물두멍은 바다(아래 물)를
의미한다. 최초의 땅(에레츠)은 흙탕물이었다. 그런데, 뭍(번제단)이 드러나고 바다(물두멍)가 되었다. 물두멍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는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이
등장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 나는 것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3장 26절에서『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세례는 물세례와 불세례가 있다. 물세례는 홍해를 건너는
것이다. 물세례는 죄에 대해서 죽음을 의미한다. 물두멍에서
씻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불세례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불세례를 받은 자는 역시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게 된다. 절기로는
무교절과 관계된다. 무교절은 죄의 확산을 경계한다. 비진리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2-3장이 해당된다.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들이다. 언약에 대한 소송이다. 교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말씀들인 것이다.
셋째 날, 뭍은 떡상이다.
출애굽 당시 맛나와 연결된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제자들은 먹을 떡을 사러 갔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서 참 양식을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5장은 영생에 관한 이야기, 6장은 떡에 관한 이야기(오병이어)다. 출애굽기에서 맛나를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이다. 절기로는
초실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4-5장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늘의 보좌와 첫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넷째 날, 마오르는
등잔대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일곱별(일곱교회의 사자)을 말한다. 일곱별은 복음을 전하는 자(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별과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9장은 맹인을
고쳐주신다. 절기로는 오순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6-7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일곱 봉인과 인을 치는 내용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나가 천국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섯째 날, 새(바다)는 분향단이다. 분향단은 기도(전쟁과
고통)와 은혜를 나타낸다. 성도의 심령속에 성전이 세워지면, 성도의 앞에는 일곱 족속이 등장한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 속의 지성소로 들어가(들맆새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파루시안)속으로
들어가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7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계속 말씀을 전하므로 유대인과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8-14장까지 여기에 해당되는 내용이 연결된다. 절기로는 나팔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8-14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나팔절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설교하므로 일어나는 것이 영적전쟁(12-14장)의 이야기다. 그래서 순교자가 생기는 것이다. 순교자의 피가 대접 심판을 불러 일으킨다.
여섯째 날, 짐승(사람)은 휘장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8-19장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붙잡혀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절기로는 속죄일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15-19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A.D.30년 경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가운데 40년간의 기간은 회개의 기간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판의
이야기가 나온다. 큰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옛성전이 무너지면 새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서,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파루시안)하신다.
일곱째 날, 안식은
법궤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9장 38절부터 마지막 장(21장)까지를
나타낸다. 무덤은 지성소를 상징한다. 요한복음 20장 11-12절에서『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두 천사는 언약궤에 있는 그룹(천사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서 살아나면 그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안식은 하나님이 물질세계에 있는 영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약속의 씨를 두신 것이다. 씨를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 나라로 복귀할 때, 그 또한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가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회개하여
죽은 자같이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탕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영들을 말한다. 그러나 회개하여 죽은 자 같이 되어 돌아가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장사지낸바 되었을 때, 영의 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는 안식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의 군대는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 안식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안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그 안식일을 통해서 백성들이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 자체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므로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장래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으면 그것이 안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안식을 주겠다고 표현이시다. 첫째를 포함해서 여섯째 날은 세상에 대한
날이다. 사람의 일이 끝나는 날이 여섯째 날이 된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안식하는 것이다.
3.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3장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하늘 왕국이 가까이 온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온 것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부분에서 땅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대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중 아무도 이를 깨닫는 자가 없었다.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영토 개념이다.
요한복음 2장 13-14절『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갈릴리
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힘든 여정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성전 안에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셨을 때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되셨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왔던 사람들은 비단 예수님과
제자들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지역이 아닌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 먼 거리 여행을 하게 되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준비물들 중에 특히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인 짐승을
손수 이끌고 먼 길을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므로 제물을 예루살렘에서 구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물뿐만 아니라 로마의 경제적 지배를 받고 있었던 모든 나라들에서는 로마의 화폐를 상용했다. 이스라엘 지역에 와서는 로마의 화폐보다는 유대인의 화폐로 환전을 해야지만 제사를 위한 제물 구입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지리적 상황이 성전 이방인들의 뜰에서 제물을 구입하기 위한 환전행위와 제물로
드려질 짐승의 매매행위를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했다.
요한복음 2장 15-17절『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메: μὴ 하나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세워졌다. 첫 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이고
두 번째는 스룹바벨 성전이고, 세 번째는 이두매(에돔) 출신의 헤롯이 세운 성전이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성전은
헤롯 성전이었다. 여기서 성전은 성전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이방인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써 누구든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방인들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쪽문인 미문을 통과하면 여인의 뜰이 있으며,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문을 통과해야지만
이스라엘의 뜰을 밟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뜰은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써
가로 약 68미터에 폭이 5.5미터로 펼쳐져 있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이나 담은 없지만 경계 표시로 계단이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이 제단 위에서 제사 드려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뜰 앞에 있는 경계선인 계단을
넘으면 비로소 제사장들의 뜰이 있는데 여기에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앞에는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언급하셨을 때 그 성전은 누구든지 있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여기서는 어떠한 제사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 아니었지만 왜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는 의분을 표출하셨겠는가?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은 이제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성전이라고 말하는 건물은
장사꾼들이 모이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교회 공동체 건물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키시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던 성전 지도자들은『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하면서 반발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이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46년 동안 짓고 있었던 성전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말하면서 46년 동안 짓고 있는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을
신성모독하는 사기행각을 하는 범죄자로 결론짓고 이때부터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이려고 음모했다.
3년 후에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고소했던 죄목이 마태복음 26장 61절에서『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쳐다보고 빈정대며 욕한 내용이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여』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자기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날부터 유월절마다 수천 수만의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식이
사라질 것이며, 예루살렘 같은 성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계시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그를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 22절『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에게르테 에크 네크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토 로고)을
믿었더라』에게르테 에크 네크론(ἠγέρθη ἐκ νεκρῶν)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세워졌다(일어났다)는 말이다. 부활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다시 사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부터 영의 몸으로 세워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성전이 되었다 라는 의미다.
제자들이 기억한 것은 사흘만에 성전을 세운다는 말이었고, 믿은
것은 성경에서 하신 말씀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 두가지를 믿은 것이다. 호 로고스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반쪽짜리 믿음인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 이것이 새성전이다.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져야 새성전(새사람)이
세워지는 것이다. 새성전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세워지는 것이다.
부활은 반드시 옛성전인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무너지고, 새성전인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부활을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같은 것이다. 무너진 돌로 된 옛성전을 다시 복구하여 참성전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과 같은 것이다. 성전은 돌성전이 아니라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를 아무도 빼앗을 수 없게 되어있다. 요한복음 10장 28-30절『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대해서, 예수는 여호와의 이름이며, 여호와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창세 전에 이미 계획하신 것으로, 범죄한 천사로 인한 것이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영들이 자기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깨닫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21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로 살아계실 때는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되지만,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시므로, 이 세상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육체로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신다는 말씀이다. 영토가 땅에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육체로 계신 것보다,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시면,
성령으로 연결되므로, 성도에게 훨씬 유익이 생기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여러가지를 깨닫게
해 주신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바로 천국이며, 심령
속에 새 성전이 세워지는 것, 새 성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들어와 임재하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 심령 속의 성전이 바로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것, 에덴이 천년왕국이라는 것, 성전이 세워진
자가 성도이며, 바로 십사만사천이라는 존재이며, 성도는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위임하셨다. 사도행전 5장 31-32절『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인간들(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죄사함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페신은 죄로부터 자유함이다. 죄사함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이다. 죄로부터 죄인을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은 통치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구세주가 된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말을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크게 분노했다. 당시 임금은 로마 황제가 유일하고, 그 로마의
인증 아래, 헤롯 왕이 있었지만, 그들의 공회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유일한 지배계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임금이라고 하므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자신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마태복음 27장 11-12절『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임금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을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권한은 죄를 사해주는 권한과, 하늘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증거하므로, 증인이 되며, 성령 또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증언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는데, 여기서 죄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모독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속으로 들어오면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이를 믿지 못하는 신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다는 말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죄를 적용할 법이 없다는 말이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성경은 이렇게 말하는데, 신도들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으면 정체성의 변화가 있게 된다. 육적 자아에서 영적인 자아로 바뀐다. 그래서 로마서 8장 5-8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자신이 여전히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육신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가 생각나는 것이다. 이들은 아무리 죄를 용서받으려고 해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령이 증거하는 의에 대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의에 대해서 살아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역시 의에 대해서 살아나신 것이다. 의는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이다.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영적으로 영생을 얻는 부활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신자들은 육체적 부활을 믿고 잇다. 성령이 증언하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는 부활생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홀연히 변화되는 것은
심령 속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다. 이는 죽은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일어나는 영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영이 육체 속에 갇혀 죽어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었던 영이 영의 몸을 입고, 부활생명으로 살아난다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의 몸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영의 몸이라는
말이다.
세번째 심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사탄으로부터 피값으로 회개하는 죄인을 사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1절『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사탄사탄부터 죄인을 넘겨받는 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사탄은 죄인을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는 이미 심판받은 자가 된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렇게 성령이 증언하고 있는데도, 믿지 않는 신도들은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자들이다. 아무리 성경에서 말해도, 신도들은
육적 경험과 지식에서 벗어나면,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며, 죄 아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임할 수 없으며, 오직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4.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1)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
①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바로 천국이며, 셋째 하늘이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구분을 해야한다. 히브리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 왕국이라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개역개정은 천국이라고
번역했다. 천국은 한자어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 왕국이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하늘을
사용한 곳은 마태복음 이외에도 마가복음 16장 19절에서『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여기 하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톤 우라논이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의 천이라고 표현된 톤
우라논이 마가복음에서는 하늘로 번역되었다. 같은 의미이다.
누가복음 24장 51절에서도『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하늘이 톤 우라논으로서
마태복음의 것과 같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도『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하늘 역시 톤 우라논이다. 말하자면 마태복음 만 천국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한글 개역개정에서 번역이 마태복음은 한자의 천국에서
천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한글의 하늘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곧 성전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연결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부하나님을 첫째 하늘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이를 둘째 하늘로 볼 수 있으며, 성도는 셋째
하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성령으로
연결된 통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하늘에 대해서, 보좌에 계신 성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셋째하늘은 에덴동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하늘은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신령한 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소마 프뉴마티콘(영의 몸)이다. 그들은 둘째하늘의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차별이 있는 신령한 영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셋째하늘이 바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이며, 이 땅에서 회복해야 할 하나님 나라(톤 우라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이지만 셋이다.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인들이 가는 감옥도 그
나라 안에 존재하므로 갇혀 있는 나라인 것이다. 감옥이 없어지면 갇혀있는 나라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하늘이라는 의미는 이 세상이 감옥이라는 전제하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감옥이 된 후에 언젠가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 이 감옥과 관련하여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셋째하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 하늘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②심령 속에 새 성전이 세워지는 것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셨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이 성전은 옛성전으로서 죽어야 할 성전이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그리고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옛성전은 왜 무너져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옛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우상처럼 앉아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비유가 포도원의 농부의 이야기이다. 마가복음 12장 1-5절에서『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집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도원은 집이라는 개념이 된다. 집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았는데, 성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즉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성전을 심령 속에 심은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어놓았는데,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은 세를 통해서 넘겨받은 포도원이다. 심령
속의 밭을 경작하는 것이다. 굳었던 땅을 갈고 옥토를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성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농부이나 땅을 갈지 않은 그런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부가 땅을 경작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주인으로
부터세를 받았으니, 농부가 주인에게 열매를 바쳐야 한다. 열매는
심령 속의 성전을 통해서 영생(그리스도)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세를 물려받은
성도 역시 농부라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타국에 갔더니』 집은 성전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심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성전 밖에 있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있음에도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를 준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성전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에서, 와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악한
농부)가 진멸당하고 영적인 자아(다른 사람)가 살아나면 포도원(새성전)을
주는 것이다. 진멸당하는 것은 옛성전의 파괴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육적 자아)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진멸당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지고, 새성전(새사람: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원(옛성전:옛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도원(새성전:세사람)을 넘겨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역할을 수행하신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그리스도로서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으나, 첫사람 아담이 남자와 여자에게 죄의 몸을 주고, 그 죄의 몸이 계속
대를 이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에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은 자들인 것이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온 죄의 몸이라는 사슬을 끊고, 부활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성도에게
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되는 성도의 옛성전을 파괴하고, 새성전을
심어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6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옛사람은 옛성전에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자기라는 모습이다.
③새 성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들어와 임재하시는 것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볼 때, 시내산에서 불가운데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백성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오직 택하신 자 모세만이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택하신 백성,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불과 같이 나타나신다. 마가복음 9장 1-3절에서『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와 임재하실 때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카타베세타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카타베세타이는 재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그리스도 이전의 믿음의 선진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성도들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영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파루시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카타베세타이이고,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임재(파루시안)하시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이전의 육의 몸이 죽고,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호 로고스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말한다.
영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라는
것은 육적 몸이 갑자기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것은 죽고, 영의 몸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출애굽기 25장 40절『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성막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성막은 창세기 2장 8-9절에서 등장하는 에덴동산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첫사람을 두었다.『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식양대로 만들었으며, 에덴동산이 바로
성막이며,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것이다. 성막에는 지성소가 있으며, 지성소에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으며, 두 케르빔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좌하며, 그곳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성막 안에는 금으로 된 성막 기구들과 생명의 빛을 생징하는 등잔대, 생명의
떡인 진설병이 있으며, 다른 불을 드리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진설병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두어야 한다.
성막이 에덴동산으로 표현되는 바, 에덴동산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만 한다. 에덴동산은 세상 가운데서 세운 하나님 나라 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깨달아라는 말씀이다.
성막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는 하나님, 사탄, 아담과 하와, 천사들이 등장하며,
생명나무, 산악지식 나무가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천사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9절을
다시 번역하면,『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모든 나무를
자라게 하시니, 그것은 정원가운데, 기쁘고, 양식을 위해 보기에 가치있고, 생명이 있는 나무이다. 그리고 선악 지식나무.』하나님이 지으신 나무는 세가지 종류인 것이다. 기쁨이 있는 나무, 양식을 위해 보기에 가치있는 나무, 생명이 있는 나무이다.
그런데,『선악지식 나무』가 갑자기
끼어든다. 선악지식 나무는 자기의 의를 나타낸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는 나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무를 만드시지 않는다. 선악지식 나무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3장 24-25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라지가 바로 선악지식 나무에 해당된다.
마태복음 13장 24-25절에서『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좋은 씨는 생명나무가
된다. 그러나 가라지는 선악지식 나무이다. 누가 가라지를
심었는가? 원수가 심었다는데, 원수는 누구인가?
원수는 하나님 자리에 앉고 싶은 자,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천사들의 영을 흙에 가두어서 만든
것이 바로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인간 이 창조될 때 인간의 마음 속에 성전을 두셨는데,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
자기라는 우상이 앉아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주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인 된 옛성전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돌성전은
무너져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셨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의 몸, 옛성전은
없어지고, 하늘로부터 새성전이 세워져야 함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새성전이 되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하여 죽고,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도 새성전이 세워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나아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새성전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지 않는 신도(기타 사람들)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는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물론 마지막 날에 성도가 아닌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주로 오신다. 이것이 백보좌 심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신도에게는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신도들은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여전히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가 하나님 나라(천국)가 된다. 그래서 천국 혼인잔치로 비유하신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가 만나 하나가 된다. 성도는 천국의 열매를 맺고, 다시 부활의 씨를 퍼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도록 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성도의 주인이 되므로, 성도의 이름은 십사만사천이 되며, 천년왕국의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종말에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믿는데, 현재적 부활을 믿고,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자에게는
지금 바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며,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사탄이 세상 왕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노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당당히 진리의 복음(현재적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비진리에 갇혀있는 자를 구출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마태복음 11장 12-15절『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에 대해서 많은 목사들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이런 열망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을 한다. 심지어 몸부림친다는 표현까지 한다. 또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힘쓰는 사람이 천국에 입장하게 된다고 말을 하며, 적극적, 열정적, 헌신적인 믿음생활이 바로 천국의 열쇠임을 깨닫게 해 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국이라고 번역된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율법시대는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이 세례요한까지 로서, 이는 심령
속에 세워진 옛성전을 의미한다. 이 옛성전에 주인이 자기라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믿음의 성도에게 심령 속으로 침노해 들어가, 옛성전을 파괴하고, 새성전에
주인으로 계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침노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온 자였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서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엘리야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자였다. 말라기 3장 1절에서『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와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예비하는 자였다. 그는 예수님 보다 먼저 목이 잘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리는 예표가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는 예표가 되는 것이고, 엘리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부활함을 믿는 자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증언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영으로 세상에 온 참 선지자였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부정하고 그 분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세례요한과 같은 자가 있는 반면,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 표현된 짐승과도 같은 거짓선지자들이 있다. 거짓선지자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 스며들었지만, 오늘날은
거의 대부분 교회 공동체가 이들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는 참 예수를 전하는 자와 가짜
예수를 전하는 자로 구분된다. 참 예수는 육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고,
영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기 위해 오신 예수이지만, 가짜 예수는 육의 몸으로 부활한 예수, 세상에 복을 주기 위한 예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육체가 죽은 후에 가는 정도의 영적 세계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세상에서
받는 축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인본주의에 의한 기복신앙, 율법주의, 신비를 따라가는 영지주의가 그 바탕에 있다.
세례요한은 증언한다.『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죄의 문제)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이 내려 머무는 사람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부활) 베푸는 이인 줄로 알라 하셨고, 그리고 내가 보니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머물렀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증언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십자가의 죽음),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분(부활의 첫열매) 예수님을 증언하며 마침내 세례 요한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삼년을
지내고 십자가에서 죽고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여야 할 증인이 된다. 두 증인은 바로 제자(성도)들이며, 성령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부활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세례요한이
증언이 되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떠났을 때는 제자들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는 미혹된 거짓 증인들로 가득한 것이다. 복음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들에 의해서 왜곡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된 성도들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증언하는 역할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주목을 받을 자가 아니라, 그 주목을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회개를 외치는 것이다. 천국(예수 그리스도)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 부활됨을 믿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게
증인된 제자들의 몫인 것이다. 증인된 제자들은 엘리야의 영으로 온 자들이 된다.
④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첫사람과 마지막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과의 관계에 있어서,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번역하면『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첫번째 나신 분(초태생)』이 된다. 첫사람은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형상은 모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세상에 태어난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대속의 죽음을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최초의 그리스도인 첫사람은 죄의 몸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첫사람이 만들어진 배경은
창세기 2장 7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이 되니라.』 네페쉬는 영어로
soul로서, 살아있는 생명(한정된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로는 죄의 몸을 하고 있다. 다음 세대에 죄의 몸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
메시야가 출현하여, 죄를 대속하므로 죄의 몸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죄로 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첫사람의 심령 속에는
성전이 세워졌으며,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후에 성전을 통해서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이다. 회개하여 약속된 여인의 후손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 대로”에서 형상은 육으로는 죄의 몸을 하고, 심령 속에는 성전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는 남자와 여자의 심령 속의 성전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죄의 몸에 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전에는 자기가 앉아있는 모양이다.
포도원(성전)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하나님)가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로 세상에 창조된 사람들의 성전에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사람과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이다. 첫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처럼) 만들었으며 자기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창조하시는 내용이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첫사람(그리스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졌는데, 이 형상을 따라 우리(성부와
그리스도)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이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자는 표현이 된다. 첫사람과 남자와 여자의
형상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의 차이가 된다. 첫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이후의 사람에게는 성전에 자기가 앉아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방법을
창세기 2장 21-22절에서 설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첫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담(사람)이지만, 남자는
이름이 아담이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였다. 개역개정이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아담이라고 하므로, 남자인 아담과 중복되는 혼란을 주는 것이다.
첫사람으로부터 갈비뼈를
빼어서 여자를 만든 것은 결국 남자와 여자로 분리,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7절에
의하면, 첫사람이 창조되었고, 잠이 든 순간 사라졌고,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가 이어서 창조된 것이다. 잠이 든 첫사람은
사라지고, 눈을 뜬 남자(이름 아담)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고 난 뒤부터 심령 속의 하나님의 형상인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 성전에 자기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옛성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가신 후에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니므롯과 같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범죄한 천사로 시작하여, 인간이 된 후에 나타난 자기 형상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일곱의 가족을 제외하고 물로 심판하셨다.
오늘날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그 성전에 하나님은 없고, 자기가 우상처럼 앉아있는 것이다.
⑤심령 속의 성전이 바로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것
에덴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범죄한 천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을 가졌으며, 이들이 가진 탐욕은 오늘날 인공지능과 유사하게 그들의 집단 선악 지식나무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에덴에 생명나무를 두어서 그 열매를 먹게 했는데,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선악 지식나무가 독버섯처럼 나타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바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창세기 1-3장의 내용은 창세 전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주된
내용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었다. 계명을 어긴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긴 것이 죄의 근본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계명을 어긴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은 하와를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어두운 구덩이(지옥)에 가두었는데, 천사의 영을 흙과 결합시며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다. 첫사람은 모든 인간들에게 죄의 몸을 물려주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그 첫사람은 죄의 몸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첫사람이 분리되어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남자를 아담, 여자를 하와라 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첫사람도 아담, 남자도 아담으로 되어있으므로 혼란스럽다. 첫사람의 아담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담이다. 두번째 남자라는 아담은 이름의 아담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나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도가 에덴으로 다시 들어가려면 천사들이 지키는 불칼을 맞아야 한다. 불칼을 맞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생명을 받아서 다시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⑥에덴이 천년왕국이라는 것
천년왕국은 천국의 다른 이름이다. 성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면 그는 천년왕국에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 또는 천국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천국(하늘나라)은 헬라어로『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이 천년 동안 사탄을 무저갱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사탄이 죄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정기간 중지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개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한다.
천년왕국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이다. 부활을 이루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5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천년왕국을 예수님이 지상재림하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칠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고,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설 등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을 근거로 환란을 피할 수 있도록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안에 있는 생명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리스도
안에 성도의 이름(십사만사천)이 새겨지는 것이다. 이게 천년왕국이라는 말이다. 천년왕국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 바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⑦성전이 세워진 자가 성도
성도(Saint)의
의미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도쉬"와 헬라어 "하기오스'란 말을 번역한 것이다. 성경에서의 거룩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사물을 신성한 사용을 위해 구별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막에서 사용된 물건을
"성물"(거룩한 물건)이라
불렀고,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직을
"성직"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백성이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세상 모든 나라 중에 따로 구별해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들은 세상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로 선택을 받았으며, 따라서
신성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후에 이 언약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 확대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의 백성과 자녀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장 9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거룩한 백성, 즉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죽은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의식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특히 하나님은 거듭난 자들 안에 거룩한
영(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세례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소유한
거룩한 성전이 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을 "성도", 즉 거룩한 무리(구별된 무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⑧성도가 십사만사천이라는 존재
요한계시록 7장 4절에서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십사만 사천은 사람 수가 아니라 단순히 숫자이다. 십사만 사천은
장막을 의미하며, 그 장막을 이끄는 군대를 의미한다. 인을
친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는 숫자를 세는 것이다. 성전의 숫자를 십사만 사천으로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성막을 지키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성소에는 안쪽에 레위지파(12), 바깥에는 야곱의 열두
지파(12)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12와 12를 합하면 24장로가
되고, 곱하면 144가 된다. 십이(12)는 하늘의 뜻(3)이
땅(4)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를 갖는다. 3곱하기 4를 하면 12가 되는 것이다. 더하기는
합해지는 숫자이다. 합해져서 하나가 되지만 하늘과 땅의 구분처럼 분명한 구분이 있다. 그러나 곱하기는 섞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너와 나의 구분을 알 수
없듯이 섞여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1000)은 히브리어
알파벳 중 알렙(1)에서 시작된다. 알렙은 천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하루가 천년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일이요 천인 것이다. 천은 하나님의 임재, 통치를 의미한다. 그래서 천년왕국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의미한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시점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1260일, 3년 반으로 표현된 기간은 짧지만 고통의 기간이다. 예수님은 삼년
반 공생애를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고난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천년왕국은 길다는 의미가 있다.
십사만 사천에서 144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존재를 의미하고, 천(1000)은
존재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완성의 기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숫자 개념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성전의 규모도
144규빗이라고 했다. 성도가 바로 144규빗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혼식 장의 신부를 표현한 말이다. 회복된
에덴을 나타내며, 셋째 하늘, 새하늘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가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144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서『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말씀)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 짐승의 표를 가진 자와 전혀 다른 말씀이다.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은 진리의 말씀이지만, 짐승의 숫자는 비진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어린양은 시온산에 있고, 함께, 십사만사천이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와 모래
위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시편 2편 1-2절에서『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⑨성도는 부활생명을 가지고 있는 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3장 18-20절『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육체에 갇혀있다가 살리심을 받았는데, 그 영이 옥으로 갔다는 것이다. 옥은 다름 아닌 모든 인간의 육체를 의미하며, 그 속에 갇힌 영에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삼일 만에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셔서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사십여일을 보내신 후에 승천하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제자들의 심령 속에 새성전을 세워주시고, 그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을 입증하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회개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는 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이 제자들이나 성도들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말씀을 한다. 부활이라는 말에 대해서, 육신의 입장에서 보면, 육이 부활한다고 믿게 되지만, 영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하늘의 생명인데, 흙에 잠시 갇혀 있다가 다시 하늘의 생명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이므로, 육이 죽고,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도, 육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0장 35-36절에서"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30절"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한다. 천사는 영이다. 그래서 부활은 죽었던 영이 생명의 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20장 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장 26-27절에서『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38절에서는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
다시 번역해 보면, 『그는 나를 만지고 영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뼈를 가진 너를 보듯이 뼈가 없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도마와 같이 그런 부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몸은 영의 몸(πνεῦ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만일 부활이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으면, 이들은 다시
살아났으므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분명히 말했다.
고린도전서 15장 21-23절에서『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는, 부활한
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3장 13절『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라는 분은 누구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성육신으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만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죽은 자를 살리셨다. 나사로를 살리고, 나인상 과부의 아들을 살렸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쿰(아이야 일어나라)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이 돌아왔다고 한다. 누가복음 8장 44-45절『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세명의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두고 부활이라고 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이 떠나갔다고 한다. 마태복음 27장 50절『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프뉴마)이 떠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8-19절을
보면,『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부활을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되려면, 적어도 죽었던 육체가 먼저 살아나고, 야이로의 딸처럼 영이 육체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야이로의 딸과 같은 상태가 되는데,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살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부활의 몸을 영의 몸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 35-38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장래의 형체를 뿌린다는 것이다. 나중에 씨가
열매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씨껍질이 죽고(사라지고) 그 속에 있는 씨눈이 자라서 다른 형체로 바뀌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엔 아프타르시야) 살아나며(에게이레타이)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엔
아프타르시야(ἐν φθορᾷ)는 영생 안에서, 에게이레타이(ἐγείρεται)는 일어난다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다시 살아난다 라고 번역하므로 마치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다. 신령한 몸이라고 번역된 소마 프뉴마티콘은 영의 몸이다.
부활은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하이마)과 육(사륵스)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처럼
수많은 성경 귀절을 통해서 영적 부활임을 말해주고 있다. 부활을 정리해보면, 육체 속에 갇힌 영이 죽었는데, 영이 죽은 자 기운데서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육체적 부모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몸(영의 몸)을 입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부활이 육체가 죽은 후에 일어나는 미래적 부활인가, 아니면, 현재적 부활인가?
로마서 6장 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그의 죽으심과
연합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부활의 연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3-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했다. 11장 22절에서 마르다가 말하기를『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다시 살리라』라고 했는데, 마르다는『다시 사는 것』을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예수님이 11장 23-26절에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문장의 구조가 대단히 어색하다. 성경의
말씀은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신도들은 육의 부활로 생각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된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8-50절『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은 부활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죽지 않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영의 몸으로 영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⑩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
에베소서 6장 12절『우리의 씨름은 혈(하이마)과 육(사르카)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앺우라니오이스)에 있는 악(포네리아스)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혈은 혈연을 의미하므로,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의미하며, 사르카는 죄의 몸을 의미하며, 이는
첫사람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선악지식 나무를 상징한다. 선악지식
나무는 마치 인공지능과 같은 천사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을 나타내는 것으로
독버섯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죄의 몸을 두게 하신 것이다.
앺우라니오이스는 심령 속의 하늘을 의미한다. 심령 속에는 옛성전이 있는데, 이 옛성전에 죄의 몸에 해당하는 자기라는
우상이 있는 것이다. 포네리아스는 타락, 음모, 죄악 등으로 자기라는 탐욕의 우상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성전에 주인처럼 앉아있는 모습이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은 성도의 영적인 상태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들의
영향 아래 있게 되면 결국 자기의 심령 속의 성전에 자기라는 우상이 그들의 영향 아래 자신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은 그 성전에 누가 앉게되는가 라는 것이다. 이게
구원과 직결된다. 자기라는 우상을 쫒아내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영적 전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해 거의 대부분 사탄
또는 악한 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전쟁도 육적인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 나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와 싸우는가를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라는 정체성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나타나는 자아는 바로 육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육적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의 특성을 갖는 집합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자아는 하나님과는 적대적인 대립을 세우기 때문에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거부한다.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설 수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영은 흙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을 하자면, 세상에 살다가 죄를 범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세상에서 입던 옷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일정기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감옥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죄수복에 적힌 번호가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힌 영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육체 속에 갇혀 있으며, 죄의 몸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감옥 속에 갇혀있는 자가 자신의 이전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생각하고, 함께 살아온 가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만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씨뿌리는 비유로 설명한다.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경작하면서 생명의 싹이 자라듯이 육체 속에 갇힌 영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묵상과 성경의 말씀을 읽으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말씀을 하기를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근본적인 원인은
영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그게 탐심이며,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죄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죄인은 두번 죽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글 번역 성경은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두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흙에 갇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자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첫번째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물세례이다. 로마서 6장
3-7절에서 세례와 죄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사람은 스스로 죽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회개하는 인간들을 대속하는 것이다. 단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것 뿐만 아니라, 함께 죽었음을 믿게 하여 죄인도 역시 죽으므로 죄를 사면받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성도가 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백보좌 심판은 율법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된다.
두번째 죽음은 죄의 몸에 대한 죽음이다. 이것은 불세례이다. 이전의 옷을 벗고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죄의 몸은 육체와 영이
만나서 인간이 되는 가죽옷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이다. 그런데, 이는 육체로 비롯된 옷이므로, 그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자는 새로운 옷(영의 몸)을 입으므로 영이
빛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3-44절에서는 영의 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설명하였다. 영의 몸을 부활한 자의 몸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육체가 있으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부활한 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한
것을 믿을 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셋째 하늘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재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는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육체로부터 나타난 자기의 정체성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자기 정체성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아식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된 나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정체성이고, 나의 적은 다름 아닌 육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며, 부인해야 하는 주체는 영적 자아인 것이다. 이 둘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영에 대해서 감옥과 같은 곳이다. 세상에도 감옥을 관리하는 자가 있다. 교도소장이 있으며, 부하 직원도 있을 것이다. 죄수를 법으로 통제하고, 불법을 저지를 때는 법으로 처벌하고, 노역도 시킬 수 있다.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죄인에 대해서 악역을 맡은 공무원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도소장은 사탄, 그 밑에 있는 자들은 악역을 맡은 천사들이다. 그래서 어두운 영(마귀 등)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 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에 대해서 두 번 죽은 자에 대해서는 세상(교도소)을 떠나기 전이라도 죄없음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어준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악역을 맡은 간수들이 더 이상
간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육체로 인해서
세상에 살아갈 뿐인 것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1서 5장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다만,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났더라도, 사탄이나 어두운 영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육적
자아가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대로 결과가 주어진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고,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영적 전쟁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싸움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을 깨닫는 자는 반드시 이기게 돕는 분이 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에 세워진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말씀을 통해서 돕게 해주시고, 기억나게 해주신다. 나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자는 날마다 영적 힘을 얻기 위해 생명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죄에 대해서 연합하여 죽게 하신 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부활하게
하신 분은 성부이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기억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하나님 나라
①세 하늘의 개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하나님 나라를 세 하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첫째 하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둘째 하늘, 성도의 심령 속의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셋째하늘이 바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이며, 이 땅에서 회복해야 할 하나님 나라(톤 우라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이지만 셋으로 설명된다.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인들이 가는 감옥도 그
나라 안에 존재하므로 갇혀 있는 나라인 것이다. 감옥이 없어지면 갇혀있는 나라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하늘이라는 의미는 이 세상이 감옥이라는 전제하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감옥이 된 후에 언젠가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 이 감옥과 관련하여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셋째하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 하늘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②하나님 나라는 계명 속에 서있는 나라이다.
요한복음 14장 15절『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Ἐὰν ἀγαπᾶτέ με, τὰς ἐντολὰς τὰς ἐμὰς τηρήσετε·)
테레세테(τηρήσετε)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레세테의
기본형은 “테레오” 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문자적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마가복음 12장 30-31절『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성령이 주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에 두고, 마음 속에 간직한 모든 계명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이다. 그 계명에 대해서 성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얽매인 율법주의를
폐한 것이며, 그 속에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게 되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얽매인 자들은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오늘날
십계명이 다 폐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신도들도 있을 것이며, 십계명을 철저히 지켜 나가야 하며, 못지킬 때는 죄를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또 계속하여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자는 의미로 받아드린다. 이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해 주셨는데, 계명의 문자에 얽매여 있으므로 스스로 피곤한 삶을 삶을 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느니 마느니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의 마음으로 재해석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십계명의 규정은 하나님이 이 땅의
일을 통해서, 인간들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해주시며 회복해야 할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십계명을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그 규정에 맞게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께닫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열가지의 항목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나서 밝은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는가를 고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2절『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시내산에 이르러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언급된 내용은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두 돌판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상당한 기간 내려오지 않자, 아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게 된다.
출애굽기 32장 1-4절『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래서 모세가 산으로부터 내려와서 우상을 섬기는 백성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두 돌판을 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4장 1절에서 말씀하셨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처음 두 돌판과 두번째의 두 돌판은 제2계명의 내용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 20장 4-6절『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네게 만들지 말고 또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
20장 8절을 다시 번역하면, “너는 너를 위하여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이나 물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과 같이 하늘 안에 형상을 만들지 말며” 하늘은 눈으로 보는 하늘(sky)이 아니라, 마음 속의 하늘 나라이다. 하늘 나라를 생각하면서 형상을 떠올리면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5장 8-10절『너는
네게 어떤 새긴 우상이나,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도 만들지 말며,
………』
5장 8절을 다시 번역하면 ”너는 너를 위하여
땅에 있는 것이나 물 안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하늘 안에 대한 형상을 만든 것과 같이 만들지 말며”이다.
처음 돌판은 땅이나 물안이나 위에 있는 것과 같이 하늘 안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있는데, 두번째는 하늘 안에 뿐만 아니라 땅이나 땅 아래 물 안이나 물 안에 있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 것은 마음 속에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두번째는 눈에 보이는 것들과 같이 어떤 형상이나, 마음 속에서도
형상을 만들지 말하는 것이다. 형상이 마음 안이나 마음 밖의 눈에 보이는 것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만큼 우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마음 속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의미한다. 인간들 각자가 하나님을 자기 생각에 맞게 이미지화 하는 것이다. 농경사회나
가축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풍요를 주는 분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상징적으로 소를 하나님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발전해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두번째 돌판은 실제 보이는 동식물을 대상으로 인간들이 이미지를 확대한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신명기에서 작성된 십계명은 가나안 입구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냈는데, 열정탐꾼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다
죽는다 라고 보고하고, 그 말을 들은 모든 백성이 통곡하며 울었다.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간 돌게해서 다 죽게했다. 두명의
정탐꾼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들과 출애굽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아이들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지난 1세대 백성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마음에 새기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보호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며, 그 말씀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제 일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름으로 신을 섬긴다. 사람들이 신을 만드는 이유는
두려움과 생명의 원천인 식량의 확보에 원인이 있었다. 출애굽 당시 애굽에는 열가지 재앙만큼 자기들의
신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마음에 품는 이유는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속에서 대상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신이 성행하는데, 바다에
가면 바다의 신, 산으로 가면 산신, 천둥이나 번개 속에서
천둥의 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신, 풍요와 축복을 주는 신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다.
유일신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불렀던 아도나이, 야훼, 각 나라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번역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 유일신인가 다른 신인가 구분된다.
사람들이 믿는 다른 신은 축복을 주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누어지는바,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자기들이 믿는 알라가 참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야곱)의 후손들과
이스마엘 후손들이 서로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후에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신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다고 선언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외에는 모두 다른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모든 세상의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기독교 단체가 삼위일체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고, 그렇게 믿는 자들이 대다수이다. 이들도 또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너희들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인간들이지만,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동일하게 부르지만,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제 이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 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 를 베푸느니라.
제 이 계명은 신명기 5장 8-10절의 내용으로, 우상에 대한 내용이다. 『너는 네게 어떤 새긴 우상이나,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도
만들지 말며, ………』마음 속에 있는 하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지 말고, 땅이나 물 속이나 물 위에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교리에서는 우상과 형상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데, 한글 개역개정에서, 출애굽기는 형상으로, 신명기에는 우상으로 번역하였으므로 이에 따른 것으로 보여지나, 히브리어는
둘 다 페셀이다. 페셀은 형상으로서 마음에 있는 형상은 이미지로, 눈에
보이는 형상은 새겨 만든 우상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어버린 이유는 백성들이 하늘(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금송아지라는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 속의 이미지이던 실제 눈에 보이는 형상이든 새기지 말라고 포괄적으로 명령한 것이다.
형상(Image)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그리는 것인데, 사람 마다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이미지화 한다. 오늘날에도 신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 복을 주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등의 이미지이다. 결국 신도들은 자기가 생각한 그
이미지를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으로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십자가, 예수의 얼굴, 마리아 상, 교회 건물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 삼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다.
“망령되이” 라는 말에서 통상 신도가 세상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더렵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자라는 것이다.
망령되이 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샤브인데, 황폐, 우상숭배, 무익한, 거짓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말할 때, 자기 생각을 섞어서 말을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전달되는 것이므로, 거짓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말을 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와 같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예수이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여기에서
주 예수의 이름(엔 오노마티 큐리우 예수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Ἰησοῦ)에 대해서, 개역개정은 잘못 번역하고 있다. 다시
번역하면, “주의 이름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서『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예수이다. 주(큐리어서)에서 큐리어스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가 된다. 아도나이가 야훼로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주(큐리어스)는
곧 야훼(여호와)가 되며,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은 장차 오실메시야, 예수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 다고 말을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이다. 예수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만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된다.
제 사계명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 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4장 8-10절에서『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그런즉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것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자이다. 참 안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네 계명에서 하나님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지 못하므로 형상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우상들을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은 나를 떠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있던 존재들인데, 흙으로 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언약을 맺고,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손자 야곱과도 언약을 이어나가시고, 그래서 애굽에 갇혀있던 백성들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한다는 내용이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이다.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애굽)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데, 예수라는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네 계명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제 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이다.
제 5계명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재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베소서 5장 31-33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사람은 인자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아내라는 여자와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공경이라는 말은 순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회개하는 자들을 그의 품 안으로 넣으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백성들이 영적으로 부모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희생제물과 함께 자신들도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구원을 남녀 혼인으로 비유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도 표현했다. 남녀가 혼인하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 혼인관계를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2-24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여기서는『이러므로』는 원래 하나에서 하와를 끄집어
냈지만, 다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교회는 성도를 말한다.『너희가 교회라.』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영을 말한다. 성도들 속에 있는 영이 원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는데, 영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창세 전의 비밀이다.
창세 전에 악한 천사의 영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나가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들을 흙 속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이제 영들이 다시 살아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육이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이 살아있을 떼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육의 몸(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을 때, 하나님이 다시 영의 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시고, 영이 살아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결혼을 비유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시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이것이 영생이고, 부활이며, 거듭남이다.
제 육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요한복음 7장 19-20절『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판단하고 신성모독죄로 몰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64-65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로 예수를 죽게 했으나,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대속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이다.
따라서 살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보존하라는 율법의 규정을 어기므로 제사장이 율법을 어기는 자를 죽게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12절『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너희들은 모두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너희들은 모두 가인과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하나님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처형된 것을 간주하시겠다는 것이다. 돌로 쳐죽이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도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날마다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자들은
예수를 날마다 십자가에 매달고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믿지 않으므로, 날마다 예수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서 최초의 살인자는 가인으로 알려져 있다. 가인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를 상징하고,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자는 가인과 같이 아벨(예수 그리스도)을
죽이는 자라는 것이다.
제 칠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이다.
요한복음 8장 7-9절『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간음한 여자에 대한 처벌에 관한 논쟁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정말 여인의 음행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저의가 있는 질문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잡혀온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 여인을 놔주도록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어떻게 율법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할 것이었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사형 선고는 스스로 하지 못하도록 한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어 이 또한 예수님이 공격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대답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 눈에 음행하다 잡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잡아드릴 좋은 미끼가
될만한 사람으로, 죄를 지은 불결한 여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이 그 여인이 아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셨고, 잠시 후 그 자리에 있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여인의 죄를 바라보았을 때 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로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여겼지만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해 감히 자신이 의롭다고 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울리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은
그들의 심령에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도 다른 예수를 믿는 자가 있다면 이는 영적 간음에
해당한다. 다른 예수는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무리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모습 등이다. 예수님은 신도들의 심령 속에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10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정죄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죄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죄 지은 죄인이라고 비난하던 음행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묻지 않으시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음행한
여인은 범죄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다. 하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아직 범죄 현장에서 발각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음행한 여인과 크게 차이
없는 죄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남의 죄를 판단하고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제 팔계명에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과 거래에
진실, 신실, 공의로움이니 각 사람 에게 당연히 줄 것을
주는 것이며 바른 소유주에게서 불법 점유된 물건을 배상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주며 빌리는 것이다. 이 세상 물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
의지, 애정의 절제이며, 우리의 생명 유지에
필요하고 편리하며 우리의 상태에 맞는 것들을 획득하여 보존하며 사용하고 처리하려는 주의 깊은 배려와 연구이다. 불필요한
소송과 보증 서는 일이나 기타 그와 같은 일을 피하고 우리들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부와 외형적 재산을 구하여 보존하고 증진하기
위해 공정하고 합법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노력함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는 것이다. 바치는 것은 자기를 드리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것은 몸이 하나님 앞에서 멸하여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구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성도 역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거룩한 자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제 구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이다.
거짓증거란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실을 감추거나 축소, 변조
또는 과장하여 진실에서 떠난 모든 말과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짓 증거하는 자들은 왜 이웃에 대해서 사실이 아닌데도 거짓증거를 하는가? 그 이유는 탐욕이라는 악한 생각 때문이다. 증언하는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거짓 증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18-19절『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육적 마음과 영적 마음이 있는데, 사람을 더럽게
하는 마음은 육적 마음이다. 로마서 8장 5-7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의 마음에 있는 자는 아무리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거짓말하는
것이다. 영의 마음에 있는 자는 성령이 인도하시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증거하게 하신다.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고, 두가지의
마음이 있다. 육의 마음과 영의 마음이다. 거듭난 자도 영의
마음으로 행동해야 할지 육의 마음으로 행동해야 할지 선택하는 상황이 오는데, 영적 성장을 할수록 영의
마음이 육의 마음을 통제해 나갈 힘이 생기는 것이다. 즉 성령을 의지하여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제 십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다.
민수기 5장 21절『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먼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하고, 그 다음에
집, 밭, 종, 소나
나귀, 모든 소유로 확대해서 말한다. 탐내다 라는 히브리어
하마드는 즐거워 기뻐하다, 열망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골로새서 3장 5절『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제 십계명은 열번째 라는 의미가 있지만, 계명 전체를 총괄하여
나타내는 의미를 갖는다. 모든 계명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의
의미를 예수님은 새언약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 사랑은 영적 간음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모두가 영적 간음을 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하는데, 다른 것에 연합되려는
것에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은 이웃의 아내와 연합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적 간음이다.
마태복음 5장 27-28절『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간음이라는 행동이전에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을 지적하고 있다. 음욕은 탐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영적
간음의 시작이 된다. 영적 간음은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그 다음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공동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영적 공동체를 형제라고 표현하고, 형제를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영적 공동체를 부셔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형제에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파괴자의 모습이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형제가 다른 형제들에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그게 영적 파괴행위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 앞에서 열두 정탐꾼이 돌아왔는데, 열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보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통곡하며 밤새도록 통곡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누룩처럼 순식간에 형제들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을 죽이는 자요, 간음하는 자요, 빼앗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라는 것이다.
십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것은
1-4계명이고, 이웃에 대한 것은 6-10계명이다. 6-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이웃의 물건을 탐내는 것으로 모두 탐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하나님이
탐욕으로 오염된 죄인들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오염된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인간 스스로 이 탐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잇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③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프뉴마티
하기오) 안에 있는 의(뒤카이오쉬네)와 평강(에이레네)과 희락(카라)이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성부 하나님이 다스리는 특별한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육적으로 먹고 마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 나라가 먹고 마시는 어떤 율법의 규정에 매여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덕목이다.
뒤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하고,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평강이다. 카라는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기쁨이 된다. 프뉴마티 하기오(πνεύματι ἁγίῳ)는 거룩한 영인데, 성령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 만이 가지고 있는 거룩이다. 하나님은
의의 왕이시고, 평강의 왕이시고, 희락의 왕이시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 안에서는 언제나 의와 화평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생명(부활생명)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5장 6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영원한 부활생명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의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이유는 그에게
부활생명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의인이라는 말은 의로운 행동을 하거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활생명이 있는 자인 것이다.
평강은 화평을 이루는 자를 의미한다. 로마서
5장 9절『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죄인은 하나님에게 다가 갈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인도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연합될 때), 죄인들의 모든 죄는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므로서 다른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희락에 대해서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1-12절『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이 역사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항상 임하여, 영적으로 기쁨이 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신도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장 10-12절『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투 안드로푸)의 속에 있는 영(토 프뉴마)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투 코스무)의 영(토 프뉴마τὸ πνεῦμα)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토 프뉴마)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투 안드로푸(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자(성도)라는 의미다. 특별한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를 의미한다. 프뉴마(πνεῦμα)에서 정관사가 있으면 성령을 의미한다. 위의 역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세상의 영은 세상을 운행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서 그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은 세상을 질서있게 운행하도록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은 생명의 빛과 같은 분)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알고있는 지식은 성령 하나님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리로 만든 삼위일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과 천사가 있다. 이런 상태가 안식의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안식이 깨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질세계에 가두기 위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종말 때 다시 물질세계가 사라지고, 원래의 하나님
나라로 회복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보내진 인간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사람들 중에 선지자를 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성령의
빛을 보내주시고, 죄를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성령은 범죄한
인간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생명의 빛과 같은 것이다.
성령은 생명의 빛이며, 죽었던
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성령은 성부의 일체이시나,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일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의 빛을 주시고, 그 생명의 빛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마리아가 잉태를 하게 된다. 그래서 태어난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삼십살쯤
되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마태복음 3장 16-17절에서 말한다.『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비둘기처럼 묘사했으나, 비둘기의 히브리어는 요나이다. 요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선지자 역할을 했는데,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된다. 시내산에서 불로, 빽빽한 구름으로,
번개와 천둥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빛이신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이끈다. 마태복음 4장 1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왜 빛이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사탄의 시험을 받게하는가? 그 이유는 당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인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을 통과한 후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심판의 권능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의 빛을 예수에게 보내주셨으나, 성령은 사탄의 시험을 받게 하므로,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이 임했지만, 성령이 그 사람의 위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도 자기 위에 임한 것이다.
성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의 빛을
보내주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로 부활생명의 빛을 보내주신다. 요한복음 20장 21-22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임했으나, 성령이
떠나가기도 한다. 사무엘상 11장 6절에서『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데, 백성들이 탐탐하게
여기지 않자,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셨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을 본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3)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언제
확인할 수 있는가?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기도는 프로슈코마이와
유케가 있다. 유케는 세상의 것을 기도하는 것이지만, 프로슈코마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기도가 주기도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예수님이 하나의 모델로 가르쳐주신다.
프로슈코마이의 기도를 통해서 성도가 제사장이 되며,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구약시대 지성소에서는 언약궤가 있었으며, 십계명이
있는 두 돌판과 맛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다고 히브리서 9장 4절에서 전해진다.『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따라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에는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프로슈코마이의 기도를 통해서 호 로고스께서 말씀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시며, 성도와 교감하며,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표현한 사람이 바울과 요한이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표현하며, 너무 황홀해서 다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으며,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프로슈코마이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행동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동물을 잡아 먹으라고 했으며, 이는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시어 해야할 일을 지시하셨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요한에게는 장차 일어날 계시에 대해서 보고 적어서 알려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작성된 서신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명령하신 내용들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Ⅲ.천국의 비유
1. 씨뿌리는 비유
마가복음 4장 3-9절『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이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다. 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가? 『자기』가 바로 영을 죽이는 육의 옛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이탈되어, 이 세상에 갇힌 것이다. 성경은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교회는 성도의 영을 말한다.
영이 이 세상의 물질인 흙에 갇히므로서 죽어버리고, 인간이
된 생명체는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자가
누구이며, 씨가 누구인지, 밭(땅)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씨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며, 씨는 하나님 말씀이다. 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한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하나님이 농부이며,
씨뿌리는 자다.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곳에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가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얻게하는 열매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창세기 3장 22절에서 설명한다.『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한다. 그래서 창세기 3장 24절에서『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죄를 알게해 주시는 것이며, 죄인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율법 속에 생명과일(그리스도)을 감추어 놓으셨다. 생명과실을 먹어야만 하는데, 먹지 못하게 막으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을 흙속에 넣으셔서 인간이 되게 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지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포기하고 율법 속에 감추어진 생명나무의 과실(그리스도)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보낼 테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의를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씨는 약속의 씨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땅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땅은 흙이다. 사람의 근본은 흙이다. 창세기 3장 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땅을 간다는 것(경작)은 씨를 뿌리기 위함이다. 사람의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으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 열매맺는 일이다.
창세기
3장 17-19절에서『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식량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경작하여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적 생각이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영생의 열매를 모르는 것이다.『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영생의 먹을
것이다. 영생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땅(마음)을 갈라고 하신 것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 밖의 세상에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에서 그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위해서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경작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는 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한 것이다. 영생하는 과일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밭의 비유에서 네가지 유형의 밭이 소개된다. 즉 네가지
유형의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 만 좋은 밭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에 떨어져서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 좋은 밭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은
땅을 갈아서 씨뿌리기 좋은 상태의 밭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사실과, 이 땅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마음의 밭을 경작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잘 이해하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이 생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 거룩한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좋은 밭으로 경작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경작하는 것이다. 죽는
것은 탐욕의 마음이 죽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리고 희생제사를 통해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땅을 경작하는 의미다.
네가지 마음 밭에서, 좋은 밭을 제외한 나머지 밭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밭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과 흑암에 갇힌 자라는 것과
생명과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좋은 밭이다. 그래서 좋은 밭에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탐욕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같이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부활하여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밭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좋은 밭이 된다.
2. 등경 위의 등불
마가복음 4장 21-23절『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먼저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이 헬라어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잘못되었다. 다시 수정을 해보면『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상자 밑에나 침상 밑에 두려고 등잔불을 가져오느냐 등잔대 위에 두려고 가져오지 아니하느냐 감추어 둔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은밀히 간직한 것 중에서 널리 퍼지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헬라어 번역성경)
창세기
1장의 첫째날에서 일곱째 날까지 표현을 하면, 빛, 궁창, 뭍(씨), 마오르, 새(바다), 짐승(사람), 안식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성소의 용어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연결하여 적용할 수 있다.
넷째 날, 마오르는
등잔대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일곱별(일곱교회의 사자)을 의미한다. 일곱별은 복음을 전하는 자(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 별과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9장은 맹인을 고쳐주신다. 절기로는 오순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6-7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일곱 봉인과 인을 치는 내용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나가 천국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교회의 성도가 임마누엘이 되면 교회 안에 빛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등잔불이 된다.
빛이 그 안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빛이 되는 자가 있고, 빛이 되지 않은 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아닌 자가 그 빛을 보고 모두가 빛이 되는 원리가 된다. 빛은 집안에서 먼저 비춰지고 그 다음에 밖으로 빛이 나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임마누엘이 되는 사람은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진다.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가 흑암에 싸여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어 진다. 이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기 이전에 집안을 먼저 비추는 자가 되고 그 다음에 온 세상에 빛이 발산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말하는 빛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이 세상이 흑암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는 것이다. 원래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하나님이 흑암에 있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빛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도라고 말을
하면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 곧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빛을 비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는 흑암에 있었으므로 빛을 비출 수 없었다. 예수님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빛이 됩시다.』 또는『빛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데, 『빛이 되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빛이 되었는데, 빛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기도인 것이다. 새생명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빛이 된 것이다.
3. 자라나는 씨 비유
마가복음 4장 26-29절『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로서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땅은 흙으로 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흙의 모양을 만드시고 영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성전)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옛성전(옛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성전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부활의 몸(새성전)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새성전을 얻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옛성전)이
죽고(파괴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새성전)으로 태어나는
것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새성전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면 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새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성도가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인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된다. 로마서 4장 18-22절『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아브라함은 처음 믿을 때,『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놀라운 결단을 하지만,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우리가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자기 의지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만 주님의 명령에 분별된다.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다. 제물을 쪼개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 안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안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때 언약을 받는다. 언약을 받지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이게 99세까지다.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주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낳은 생명 이스마엘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과 하나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라는 것이다.『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말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예수믿으세요, 예수의 공로를 믿으세요 믿으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 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브람이 전쟁을 이기는 승리를 체험하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해도 안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베드로처럼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해도 베드로는 자기 확신 때문에『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믿는 자로 보여질 수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자였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말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아들의 말은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라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그 분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현재적으로 그 분과
부활로 연합하여 열매맺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장 30-32절『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했다. 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자기 밭은 바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렀을 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장면이 있다.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자기 밭에 심은 자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기 밭(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겨자 씨)를 심었다. 그래서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되었다. 이 공중의 나는 새들이 바로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새들이다. 바로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처음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약해 보이지만,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의 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겨자씨(예수 그리스도)를 성도의 심령 속의 밭에 심어주신다. 겨자씨 비유에서 밭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서는
하나님 나라 대신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천국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서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셨다. 성도 역시 부활의 열매가 맺혀지고, 성도가 전도를 통해서 그 부활의 열매를 나눠주므로서 확산되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은 이방인을 의미하지만, 현재적 부활이 되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 제자들이『우리는
왜 고치지 못합니까』라고 물렀더니『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는『날마다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육정이나 혈통으로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오직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기경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땅이 기경될 때 농부가 씨를 뿌려주는 것이다. 농부가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서 가꾸면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한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된다. 씨를 뿌리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것은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이 산)을 저리로 옮겨버린다. 그래서
저 산(새성전)을 저기서 여기로 옮겨버리라고 하면 옮겨지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권능은 병을 치료하고 죄를 사해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적
부활의 능력이 없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말을 했지만, 귀담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패역한 세다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인데,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궁금하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동안에는 제자들이 직접 권능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능력이 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밀(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24-30절『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비교하면서
말하는데, 알곡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자들이고, 가라지는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자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에 대해서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 잘 하고, 교회에 봉사 잘 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성도의 심령 속에 두가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알곡(새성전)과 가라지(옛성전)이 있다는 말이다.
알곡은 밀이다. 그런데, 가라지는 밀과 비슷하지만 먹지 못하는 독초를 말한다. 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가라지는 추수때
불사르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하신 이유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30절에서 말한 내용을 13장 36-43절에서 설명한다.『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좋은 씨(하나님 말씀)를 뿌린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뿌린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피와 부활의 살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살을 먹는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세상에서의 구원을 예정하셨는데, 그 첫번째의 언약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이 노아를
택하시고,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언약의
말씀을 계속 이어간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약속을 들어왔으며,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장차 이루어질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며, 성취의 약속을 받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은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24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여기서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현재적 부활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좋은 씨로 말미암아 결실된 알곡(십자가의 죽음)이 천국의 아들들(부활)이
된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악한 자의 아들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나타낼 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마귀 자식이라는 의미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죄인이라는 말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성도의 심령 속에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을 추수 때까지 그대로 주신다. 추수는
알곡을 거두고, 가라지는 불에 태우는 것이다(불세례) 불세례는 심판을 의미한다. 성도가 물세례(죄에 대해서 죽음)와 불세례(옛사람의
죽음)를 받으므로, 성령세례를 받고, 새성전(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불심판때 가라지를 거두어낸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어떤 신앙생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곡이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에는 옛성전이 있고, 새성전이 있다. 옛성전은 육체로부터 나타난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새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를
새사람이라고도 한다. 새성전이 세워지면, 이전에 나라고 생각한
옛성전은 이제 나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성전이 들어서도 옛성전이 바로 옆에 존재한다. 비록 나와 상관없는 것이지만, 계속 존재감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마치 알곡 옆에 있는 가라지가 알곡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내
심령 속의 가라지는 탐욕이 자리 잡고, 육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러나 알곡은 성령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5-8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6. 보화, 그물, 진주, 집주인 비유
마태복음 13장 44절『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천국을 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질문했을 때,『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고, 어떤 사람에게는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비밀이 감추어진 대상에 대해서 마태복음 13장 14-15절에서『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세리와 죄인들이
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된다.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자 중에서 사도바울 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빛 가운데서 만났다. 그리고 셋째 하늘에 직접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들었다.
그 비밀은 바로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서 말하는 내용들이다.『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바울은 이 말은 에베소서 3장 6절에서
다시 설명한다.『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11장 25-26절에서도 이 비밀을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이 말은 이사야 49장 6절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천하만민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보고 배우라는 뜻이다. 이방인을 구원받게 하는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정한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그래서
이 비밀을 시행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사도 베드로에게
사도행전 10장 11-16절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특히 10장 12-13절에서『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이방인에게 먼저 부활신앙인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여기서도 천국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천국이 보화와 같다고 했으므로 부활이 보화인 것이다. 그런데 보화가
밭에 감추어져 있다. 밭은 마음 밭이다. 밭은 헬라어로『아그로스』다. 경작된 땅과 경작되지 않은 땅이 있다. 경작된 밭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이고, 경작되지 않은 밭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여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성도가 율법 속에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너무
기쁜 것이다. 성도의 심령 옛성전이 있는데, 이를 팔아서(십자가에서 죽고), 보화(새성전)을 사는 것이다. 숨겨둔다는 말은 보화는 심령 깊은 곳에 세워지는
새성전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주도 마찬가지로 부활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을 얻을 수 있으므로, 진주로 비유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 중에서 좋은 물고기는 현재적 부활을
믿어, 심령 속에 새성전(새사람)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하고, 못된 물고기는 죽어야 할 옛성전을 의미한다. 그래서 좋은 물고기는 바구니에 담고, 못된 물고기는 버려버리는 것이다.
7. 잃은 양을 찾는 비유
누가복음 15장 1-7절『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배경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인들인데, 메시야가 오면 당연히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를 하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는
숨겨진 뜻이 있다. 듣고 깨닫는 자만이 알게된다.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11-13절에서 씨뿌리는 비유가 있다.『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서 55장 1절에서『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목마르고, 돈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이 가난한 것을 아는 자다. 영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 영을 살리는 생명을 달라고 하면 주시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생명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부활)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주신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충만한
것을 나타낸다. 일백은 열의 열이다. 즉 더욱 더 충만(부활)하다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더 넓게는 천하만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양 일백 마리는 이스라엘을 염두에 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에서『잃다』라는 말의 원어는『죽다,
파괴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잔치를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이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십자가)가 살아났으며(부활)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여기에서 잃었다는 말이 죽었다는 의미로 대체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 곧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부활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들어있다.『죽은 것과 잃은 것』의 의미는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떠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죽었으며,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것이 부활생명이다.
요한복음 9장 39-4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부활생명)에 대해서 소경인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내용은『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하고,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세리나 죄인들이다.
보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게 한다는 것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바리새인들이 자칭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므로,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눈을 감겨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생명인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돌이킨다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를 생각하고 있지만, 회개의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며 그래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육체 속에 숨겨진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육의 탐욕은 자기라는 주체로 나타난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회개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이와같이 회개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떠난 양이다. 그런데,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양이 한 일은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양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이 목자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순순히 목자를 따라 가는 것이다.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헐하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을 말한다. 목자를 떠난 양이 죄인이다. 양이
목자를 만나면, 돌아갈 수 있다.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시는데,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통하여,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혼아홉 마리의 양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 자칭 의인이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한다. 오늘날 육적인 눈으로 부활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8.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8-10절)『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두번째의 비유이다. 첫번째 비유는 백마리의 양 중 한마리를 잃어버려 그 목자가 한마리를 찾으로 나가는 비유이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으로 가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어느 여자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이야기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셔서 여자인 교회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죽어있는) 동전을 찾는 이야기다. 두번째
비유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만으로 영을 살리는 일이 가능하다. 이 두가지 비유의
마지막 귀절은 다 똑 같다.『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상태가 두번째의 비유에 이르런다.
인간의 영은 어두움 속에서 죽어있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부활)이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서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교회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마른 뼈들이
붙고 거기에 가죽이 붙고 힘줄이 붙고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성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난 것이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죽은 자가 영적으로 살아나고,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모든 사람들이 죄와 허물로 영이 죽어있는데, 죽은 영이 사랑을 베푼다고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죄로 죽은 영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노아는 의의 전파자였다.
우리의 목표는 의인(부활)이 되는 것이다. 의인이
되어야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게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막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의롭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가지가 부딪히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주님은
의인을 찾는다. 의인이 열명이라도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의인이
중요하다. 의가 사랑보다 먼저다. 의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은 먼저 공의를 구한다. 그
다음에 긍휼과 사랑이 뒤따른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말하는 실정이다. 의가 없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왜 회개하면 화해가 일어나는가? 주님이 의롭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는 노아를 의의 후사라고 했다. 즉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의롭기 때문에 방주를 허락하셔서
노아를 살게 하셨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는 아들 둘 다 부패했다는 말이다. 둘
다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선하게
보이는 자나 불의한 자나 둘 다 부패한 것이다. 탕자는 사랑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다. 사랑받고 있는 동안 아버지를 버린다. 예수님은『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 때라』라고 했다. 회개하는 자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음성을 들을 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이 말은 여자가 등불을 켜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것(회개: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에게 부활시켜주신다.
구원의 조건은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부활)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앞의 두가지
비유에서는『죄인이 회개하면』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조건이 없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권세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부활)을 입히는 것이다. 이 옷은 돌아온 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락지를 끼워주는데, 이 가락지도 아들의 신분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에는 권리를 말하고 있다. 『네 발에 신을 벗어라』는 말이 있는데, 권리를 포기하라(십자가의 죽음)는
말이다. 신을 신는 것은 권리가 회복(부활)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하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
9.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25-32절『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하게 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15장 2절에서『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므로 예수님이 3-4절의 말씀을 하게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찾으면
이웃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여기에는
회개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 다음에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가 8-10절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찾았더니『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에도 회개가 언급된다.
회개가 무엇인가? 오늘날 회개의 의미가 repent에서 receive로 바뀐 것이다. 돌이키는 것에서 영접으로 바뀌었다. 위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비유이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주님이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두번째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드라크마는 죽어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 영으로는 죽어있다는 말이다. 2장
2절에서『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허물과 죄로 죽은 이유가 바로 세상 풍속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죽어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주인은
마귀인 것이다. 에베소서 2장 3절에는『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사랑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하므로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에서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자(십자가의
죽음)가 살아 돌아오는 자(부활한 자)를 사랑한다는 말씀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는 하늘의 부활생명을
가진 거듭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실로암 망대에서 망대가 갑자기 무너져서 그 곳을 지나가던 자가 열명이 넘게 죽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억울하게 죽는 자들이 많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실로암 망대 때문에 죽은 자들이 참 애석하다』고 말하니까『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저렇게 죽으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온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의(부활생명)가 있는 자이다. 따라서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가
필요한 것이다. 의가 없는 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리고 로마서 2장 5절에는『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그의 아버지가 마귀이고 죄인들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에수님은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말씀을 한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여, 하나님의
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육신적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는 회개가 있는
자는 찾기가 쉽지않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극히 드물다는 말이다. 주님이 주인되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사는 거짓된 교인들이 득실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 만을 노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현재적 부활생명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흰옷인 의의 옷(부활)을 입지 않은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겠다고 계시록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롯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롯의
처는 율법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를 상징한다. 복음(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듣고 가다가 율법(자기의 의)으로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말씀이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끝까지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회개를 외치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노아가 의의 도를 외치는 것 처럼, 의의 도를 외치는 자만이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활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다름 아닌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10.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9절『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탕감해
주므로서 주인의 재산을 탕진했다. 그런데 주인이 이 불의한 청지기를 보고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들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빚을 탕감해주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내용이 나온다. 어떤 관원이 왕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왕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하는데,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하니까, 왕이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 관원이 왕으로 부터 물러나서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아주 적은 돈) 빚을 진 사람을 발견하고는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으며,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다고 하니까 그를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다른 관원이 왕께 이 사실을 고하니 왕이 분노하여 1만 달란트 빚진 관원을 옥에 가두고 빚을 다 갚기
까지는 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가지고『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번째의
인물은 "불의한 청지기인데, 불의한 청지기는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이 심어준 성전(옛사람: 첫사람 아담)이 있다. 이
성전을 관리하는 자가 바로 『나』라는 불의한 청지기이다. 옛사람인 불의한 청지기는 육의로 비롯된 모든
것을 관리한다. 옛사람의 모든 것을 관리하므로 부자라 생각한다.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서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농부가 소출이 많아져서 창고를 더 많이 지어, 양식을 가득 채우고
말하기를『이제 내가 양식이 충분하므로 내가 먹고 살아도 문제가 없겠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 비유를 통해서『어리섞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적
재산으로 비유하면, 이 땅에 사는 불의한 청지기들은 모든 재산이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그것을 불려서 재산을 증식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부자의 재산을 이용하여 자기의 재산을 불의하게 축적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등의 일이 있다고
누군가가 부자에게 고발을 했다. 남에게 빌려준 부자의 재산에 대해서 과도한 이자를 받고 그 중의 일부를
취하는 방법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축적했다. 주인이 이런 일을 알자 불의한 청지기와 거래를 끝내기 위해서
그 동안의 거래 사항에 대해서 결산을 하자고 했다.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되면 그 뒤에 할 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해서 묘수를 떠올렸는데,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나중에 잘 보이기 위해, 주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보고 부자가
칭찬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에게 빚진 자들의 채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이
옛사람의 것을 관리하고 주인 노룻을 해 왔는데, 이제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채무를 다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회개하는 죄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과 예수님이
하신 일과는 일맥상통한다.
그런데『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뜻이 있으며,『불의한 재물이 없어질 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불의한 재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탐욕이 숨어있는 육(옛사람)이다. 그런데,『불의한 재물로 친구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영원한
처소(천국)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엽합(친구)되어라는 말이다. 친구는 이 세상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불의한 재물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서『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그래서 로마서 6장 3-4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너희는 내가 명한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라고 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하면 된다. 명하신 것은 요한복음 15장 12절의 내용이다.『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서『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우리가 불의한 재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께 대한 빚진 자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면 이 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전하는 자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26-27절에서『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우리가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권세를 주시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는 것이다. 전해야 하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11.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누가복음 18장 1-8절『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에서”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잠시 잠깐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며,”우리 인생이 칠십이요 팔십이라도 일식간에 날라간”라고도 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음 속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심판을 대비하라”는 말인데,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듯하다.『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
『불의한 재판관 앞에 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니, 이 말씀을『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하는 기도로』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서 말하고 있다.『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본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본향은『그
곳에 살았다』라는 말인데, 인간의 영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지만, 그런데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실을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향에 돌아가려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면서 레위기 25장 23절에서『토지를
영영히 팔지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함께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가나안 땅에 대해서 나그네라 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왔으므로
애굽이 본향이 된다. 애굽이 고향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이 땅이 나그네라는 것이다.
위의 히브리서 11장
13-16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자기들이『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라』고 증거했다. 즉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떠난 온『갈대아
우르』를 말하는 것이라면 돌아갈 기회라도 있지만 그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애굽도 아니다. 히브리서에는 더 좋은 본향은『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더 좋은』의미는
물질세계인 이 땅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인생의 모든 영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와서 잠깐 지내다가 돌아가야 할 나그네 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전도서 12장 7절에 보면『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라고 했다. 육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주체는 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의 주체를 육으로 비롯된 마음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육으로 비롯된 마음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옛사람은
육으로 비롯되어 있으므로, 죽어야만 영이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말이다. 영은 육에 있으면 안되고, 영의
세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 속에 영이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갇혀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옥에 갇혔다』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이 에 세상에 오신 목적은『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기 위해서』라 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하나님은『영』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 나라에 있다. 인간에게도 영이 있다. 누가복음 8장 55절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리므로 영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요한복음 6장 63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영이 죽어있다』죽어있다 라는 말은『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라는 말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물질세계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을 만드셨는데, 왜 이 영이 하나님 나라에 있지 않고 물질세계, 흙인
육에 있는가? 즉 육체에 영이 갇혀있는 것이다. 영이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자유롭지만, 영이 흙속에 갇혀있으면 자유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영은
육이 죽으면 육체로 부터 나오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영이 육체로 부터 나오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유를 찾을 수 있는데, 육체로 비롯된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죽었던 영이 일어나, 부활인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의 마음은 육신으로 비롯된 마음과 다르다.『자기를 부인하야
한다』는 말은 이 육신으로 비롯된 옛사람을 부인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비롯된 옛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선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영을 흙 속에 넣어 주셔서 인간이 되었다. 영의 입장에서는
이 땅이 나그네라는 말이다. 흙 속에 넣었다는 말은『가두었다』라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12장 4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을 하고 있다.『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낙원은 땅에 있는 인간으로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나
물질세계, 흙으로 된 인간 속에 있는 갇혀있는 영은 흑암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들어서 부르짖으라, 택하신
자의 원한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택하신 자들이 가진 원한은『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한
마음』이다. 과부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하고, 사탄은
검사의 역할을 하며, 예수님은 변호사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재판관 역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변호사 역할도 하고 재판관도
하므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불의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죄인이 변호사이시고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호사로서 죄인(과부)을 대속해 죽는 것이며, 재판관으로서
죽은 죄인(십자가의 죽음)을 살려서 의인(부활)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소원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복을 빌고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하나님 나라에 돌아가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과
함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오늘날에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의 생명이 없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을 괴롭힌 과부는 하늘의 부활생명을 얻게 된다.
12. 바리새인과 새리 비유
누가복음 18장 9-14절『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자기의 의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면,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다. 오직, 세리는『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의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영)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께 범죄했다. 하나님은 영들을 어두운 곳에 가두어버렸다. 그곳이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흙속에 영을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날 때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처럼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첫사람 아담 이후 인간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율법을 주시고 자기의
의에 빠진 자들을 깨닫게 해 주셨다. 율법을 철저히 잘 지키면 의로운 자가 되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다가 자신들은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어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형태로 노력하여 자기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영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약속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후손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여, 씨의 언약을 하시고, 할례를 하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서 8장 3-4절에서『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겠다고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가신다. 세리에게 다가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되시는 것이다. 세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의를 이루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430년간 가두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애굽에 갇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갇힌 것과
같은 개념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임을 고백하고 부르짖고,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3-24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스스로 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마다 돌아가게 된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모든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부활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마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 속에 빠져 있는 자인 것이다.
13.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장 11-27절『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와 흡사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다.
교회 사람들은 전도를 잘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내리신다 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으며, 다시 재림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 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율법을 이루셨는데, 세상에 남겨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인 부활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을 떡으로 표현했다. 요한복음 6장 48-51절에서『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부활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달란트(헬라어)는
히브리어로『키카르』라고 하는데, 성소의 진설병의 하나였다. 즉
율법을 나타낸다. 신명기 18장 22절에서『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장래 하나님이 세우는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신
일이 증험도 있고 성취함도 있는지를 보는 것이 바로 달란트 비유와 므나의 비유인 것이다.
『장사하다』라는 헬라어로『엘가죠마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 다음날 또 유대인들이
찾아왔다. 예수님이『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일을 한다』는 것이『엘가죠마이』다. 히브리어로
『아바드』라고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경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경작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을 한다. 영적으로는 마음 밭을 갈아서 하나님의 부활 생명의 말씀을 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열매가 하늘의 생명이다.『엘가죠마이』라는『일을
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즉 『장사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달란트로
장사했다”는 말은 앞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 생명의
떡(부활)을 통해서 영생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다섯은 율법을 말한다. 다섯 달란트(율법)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그래서 열 달란트가 되었다. 열 달란트는 율법의 완성을 의미한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떡(부활)과 포도주(죄의
용서)를 남겨신 것이다. 달라트 비유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부활생명을 얻는 자들이다. 두 달란트는 산 떡(부활)이
두개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개의 달란트를 벌었다. 산떡
두개(부활)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부활을 전해서 하늘의 생명이 열리도록 한 것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떡 하나를 받아서 땅에 묻었다. 누구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것은 현재적 부활아 아니라, 육체가 죽고(땅에 묻히고) 난 뒤에 부활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23장 13-15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땅에 묻었다는 것은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은 믿지만 현재적 부활은 믿지 않는 반쪽 복음을
들고 있는 자이다. 육체가 죽어서 언젠가 이루어질 부활을 믿으므로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므나의 비유도 달란트와 거의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므나의
비유는 므나(산떡:부활)를
열 사람에게 주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리고『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한다. 열이라는
말은 온 세상을 말한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말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하는『엘가죠마이』와 다르다. 헬라어『프라그마 듀오마이』라는 말로서 이 말은『프라스오』에서 온 말이다. 『행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그
몸으로 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의(부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피를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살을 먹는 것)이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의로운 부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이다. 므나로 장사하는 것은 부활생명을 나누어주는 자라는
말이다. 값없이 장사를 하는 것이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열 므나는 말씀이 완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의 살과 피로 의로운 자(부활 생명)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고을은 성읍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은 참 성전(새 예루살렘 성)의 그림자다. 열 고을은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를 말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의 새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이다.
다섯 므나를 받은 사람도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므나를 남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이『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다섯이라는 말은 수확을 해야할 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감추었다』는 것은 육체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수건
속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므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늘의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여기서 은행(헬라어:트라페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테이블』(상)이라는 말이다. 진설병 상(떡상:부활)을 말한다. 히브리서 9장 2절에서『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출애굽기 25장 30절에서도『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예수
그리스도라는 산떡(부활생명)을 왜 떡 상에 올리지 않았는냐
라는 것이다. 떡 상에 올려 놓으면 누구라도 먹고, 부활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떡을
먹게 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자)하게 된다는 것이다. 떡을 감추어 둔 자의 죄는 큰 것이다. 감춘 자는 육체가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로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이다.
14.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장 19-31절『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 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부자를 말할 때, 세상의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옳다 하고, 높힘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한다. “호화롭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에는『깨끗하다(죄가 없다), 열락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항상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으므로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죄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즐거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지는 가난의 대명사다. 가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났으므로 이것을 깨달을 때 영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지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자라는 것이다.『나사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나자로스”인데, 히브리어는
“엘 아사르”라 부른다. 엘은 하나님이고, 아사르는 도움을 얻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의미다.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6-7절에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아브라함의 믿음은 100세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것이며, 장차 그리스도를
바라는 믿음이 된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난 것이 탕자다. 회개는 죽은 자같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즉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들이라고 고백하며 긍휼을 구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자체가 죄의 상태에 묶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죄를 깨닫고 긍휼을 구할 때, 하늘의 복을
주신다. 바로 부활 생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부활생명인 이삭을 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 사람들에게 좋아할만한
칭찬을 받았다. 누가복음 16장 15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그래서 부자는 음부에 가는 것이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고난”은『나쁜, 사악한, 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사로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설 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눈먼자, 손마른자, 문둥문둥병자 고쳐주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믿음은 백부장이 같은 믿음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부자가 음부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했다. 나사로를 살려서 세상에 나가면, 형제들이 회개할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그리스도의 약속)을 들으면 된다고 했다. 부자가 율법 속에 담겨져 있는 것(그리스도)을 깨닫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하나가 된다. 율법 속에 복음이 있는 것이다. 복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15. 좁은 문 비유
누가복음 13장 23-27절『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장 이전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이 소개된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도『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이렿게 묻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믿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는
믿음은 나의 죽음과 결부되지 못한다.『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그 문이 좁고 협착해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찾는
자도 적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만 이 문을 찾게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좁고 어렵기 때문에 이 문을 싫어한다.
문이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평생 예배한다고 반드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이 쉽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다. 구원이 쉬워보이는 길은 멸망 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셔도, 사람들
스스로 회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이 문장 중『어디에서』라는 말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단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모르는 사람이 된다. 거듭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력과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형질이 바뀌는 것이다. 이는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은 하늘로부터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은 것처럼 없던 생명이 생겨야만 되는 것이다. 그 해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다. 그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비라는 말이다.『현재적
부활 생명으로 거듭나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도 구원받는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현재적인 부활을 믿는 것은 정말 좁은 길과
같이 여겨진다. 대부분 육채가 죽어서 부활된다고 믿기 때문에 정말 좁은 길이다. 육체를 바라보는 부활은 육적 자아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성령이 인도하는 자인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만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씨앗을 뿌려서 생명으로 꽃피우지 못하면
죽어있는 것이다.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죽어있는 생명과 같다. 마태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육적 자아의 생각을 믿지 않고, 영작 자아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거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믿을 것이다. 그어나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다.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반쪽 복음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 된다. 믿음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다. 이게 부활생명이고,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길이다.
16. 새것과 옛것 비유
마태복음 13장 52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네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이고, 두 번째는 값진 진주의 비유이며, 셋째는
바다에 쳐진 그물 비유, 넷째는 좋은 집주인의 비유이며, 네번째
새것과 옛것의 비유이다.
새것은 새언약의 말씀이고, 옛것은 옛언약인 율법을 말한다. 율법과 새언약을 정확히 풀어서 해석할
수 있어야만 천국의 제자된 사기관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 너희는『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천국을 잘 배워, 말씀을 능숙하게 옛것과 새것을
꺼내어 풍성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하셨다. 성경 말씀을 읽고 남에게 전도하기 위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잘 적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새것과 옛것의
구분을 잘 못하고 있다. 이 말을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말한다.『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여기서 술은 포도주를
말한다. 포도주는 하나님 말씀이다. 술에 취하면, 이말 했다가 저 말했다가 횡설수설하게 된다. 옛것과 새것의 구분도
할 줄 모른다면 이는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술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한다.
옛것은 율법으로서, 죄인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셨다. 그래서
이제는 옛것 대신에 새것을 내 와야만 한다. 새것은 새언약으로 하늘의 부활생명이다. 새언약은 피와 살로 설명한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피를 마시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 바로 살을 먹는 것이다. 살을
먹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다.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살을
먹지 않고 보관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살을 먹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불에 태워져 버린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것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5장 21절에서『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믿음은 두가지가 있다. 부르심을 입은 믿음과 택하심을 받은 믿음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스스로
구원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으며, 또한 그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깨닫는 자의 믿음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새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구약에서는 히브리 백성이 광야에서 옛언약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거듭난 새사람이 새언약을 받게된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현재적으로 부활하여
거듭난 새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3장 6절에서『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는
거듭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복(의의 옷:부활)을 준비하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3장 14절에서『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수건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소의 휘장처럼 덮어서 죄인들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다. 곧 휘장이 찟겨진 것처럼, 에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휘장 안의 지성소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새언약에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새언약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을 알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새언약의 표를 받아야만 한다. 새언약의 표는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17. 열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 1-2절『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예수님이 본문의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연결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성경의 원문은 장과 절이 없지만, 16세기 경에
들어와서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장과 절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원문의 입장에서는 24장과 25장은 연결되어 있는 내용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25장에는 열처녀의 비유 뿐만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도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그 대상은 달란트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므나의
비유에서와 같이 열(10)이라는 숫자는『완성, 충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열처녀는 모든 처녀를 의미한다. 처녀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그래서 처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
교회 신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 신부에게 주는 포도주를 마시는 자가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혼인
전통에서도 등장한다. 예비 신랑이 예비 신부 집에 방문해서, 포도주를
잔에 따르고 예비신부에게 주는데, 그녀가 마시지 않으면, 혼인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주는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해당한다. 즉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처녀는 모두가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고 있지만, 포도주를 마신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밖에 없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마태복음 7장 25절에서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이
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슬기로운 열처녀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는 말씀이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미련한 자는 7장 26절에서『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어리섞은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셨는데,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완전히 믿지 않은 자가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악에 대해서 대속의 죽음 통해 다 이루셨는데, 여전히 신자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하여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 역시 현재적으로 부활이 이루어지는데, 신자들이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은 자는 죄를 멀리한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을 가지고 있다. 요한1서 5장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사탄이 접근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옛사람이 죽은 자가 아닐 것이다. 또한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는 자는 여전히 율법에 갇혀 있는 자인 것이다.
열처녀가 가지고 있는 등불에 대해서 잘
이해하여야만 한다. 등불에서 나오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부활생명)이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그리고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도『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착한 행실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서 착한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영을 깨우는 일(부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영광을 받는다.
요한복음 5장 35절에서『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즉 요한은 빛(부활생명)을 받아서 그 빛(부활)을 비춘다는 의미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부활)이라 빛(부활)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예수님이 성도에게 부활생명을 주고, 성도가 부활생명을 받았으므로, 부활생명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즉 부활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열처녀는 모두 등불을 가졌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다른 기름통을 가진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고 받아드린 자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처녀는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된다는 것을 믿으므로, 결국 어둠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절에서『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그릇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때 표현하기도
한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부활)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여기서,『어두운 데에 빛(부활)이 비치라』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보배는 그리스이시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인간을 의미한다.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게 부활생명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부활생명을 가질 수 있다.
기름은 감람유를 의미한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하는 감람유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성령이 임한 것을 기름부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1서 2장 20절에서『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장 27절에서『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성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들어오신 것(성령세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허ㅏㄹ생명이 되는 것이다.
결국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믿는 부활생명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부활)이 되어 빛의 생명(부활)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자가 된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육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이다.
부활이 육체가 죽어서 이루오 지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이다.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허ㅏㄹ생명이 없는 자는 율법 아래 있으므로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옛사람이 죽지 않았으며, 성령이
없으며, 부활생명이 없으며, 미련한 다섯처녀에 해당하는 것이다.
18.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장 1-14절『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에서 어떤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자기의 신부를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지칭한다. 교회는 바로 성도이며, 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신부 삼아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천하만민 중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만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인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게 부활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율법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말한다. 율법은 그 속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초청장인 것이다. 이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 보내지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초청장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다.
2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22장에서 혼인잔치 비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청함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온전히 통치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는 성령이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땅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면 육적인 몸을 벗고, 영의 몸(부활)을 입어야 하는데, 그들의 눈으로는 영의 몸(부활)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육으로
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영의 몸이 의의 옷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몸을 말한다. 그들은 부활을 알고 믿지만, 현재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종들(선지자)을 보냈으나,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죽였다. 심지어 아들까지 죽였다. 이사야 49장 6절에서
『그가 이르시되 네(그리스도)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그리스도)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부활을 위한 초청장을 보냈지만,『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홀히 하여 알 수 없게 된 것이다.『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으로』의『자기』라는 말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자기가 주인 사람은 육체가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부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자기』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악(탐욕)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버리라고 말하는데, 비유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중시하므로,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다섯겨리(25마리)를 샀기 때문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부활보다 이 세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육체가 죽어서 부활함을 믿었기
때문에 현재적 부활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초청장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교회 안에서도 현재적 부활생명을 전하는 자를 모욕하고, 정신적 살인을 강행한다.
사도행전 13장 4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부활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사도행전
28장 28절에서도『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먼저 전해지는 것을 신비 라고 말한다. 로마서 11장 25절에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초청장이 천하만민에게로 갔다.『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네거리는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경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서 권능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여기서 악한 자와 선한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을 발견하고
잔치 집에서 내 쫒았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예복은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이
혼인잔치 집에 준비되어 있는데,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인잔치
집을 채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옷(부활)을 입지 않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을 벗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의의 예복(부활)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육체가 죽어서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흙에 갇힌 자라는 말이다.
자기의
옷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는 자들이다. 자기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복은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옷을 벗고(예수와 함께
죽고), 준비된 예복(현재적 부활)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19.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25장14-30절『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성경은
비유로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창세로 부터 감추어진 비밀이라 하고, 비유를
베풀어서 알려주신다고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비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서 내면에 숨겨진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말한다.『타국에 간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율법을 이루시고, 회개하는 자의 세상죄를 다 가져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타국에 가실 때 종들에게 맏겨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이 분부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장사로 표현했다.『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라고 말하는데,『재능대로』는 인간의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로 두나미스(권능, 능력)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권능(병고치고, 각종 이적을 일으키는 것)을 따라 부활생명이 없는 것을 부활생명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금 다섯 달란트에서 헬라어 성경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없다. 달란트는 헬라어 달란톤(히브리어 키카르: 떡덩어리)에서 발전했다. 다섯
달란트는 둥근 떡이 다섯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섯이라는 말이며, 모세오경(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참형상이 아니고 그림자이다. 율법(약속)은 그림자이므로
참 형상은 바로 부활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다. 구약에 나오는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림자인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부활생명을 가진 자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는『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율법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라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달란트는 모세오경을 말하고, 이 모세오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달란트도 마찬가지로 떡 두덩어리이다.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 율법은 약속이요,
예언이다. 모세오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이 떡(히브리어:키카르)이라고 했다. 떡 두 덩어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예언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하나이다. 사도행전 15장 15-17절에서『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으면하늘 생명인 부활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예언과 성취함을 동시에 받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씀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합하면 일곱
달란트가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라고 말한다. 앞의
모든 것이 끝나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고 안식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 생명을 가진 자는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과 이루어진 말씀을 통하여 알려 주셨는데, 왜
모르는가? 그 이유는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도 땅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땅(육체)은 혼돈하고 공허한 곳이다. 그들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을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장사를 해서 남긴 것이다.『장사를 한다는 것』은『영생하도록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일을 한다는 말은 땅을 경작한다(아바드)는 말이다. 씨를 뿌리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영생하도록 하는 일(엘가조마인)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바로『장사를
했다』는 말이다.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게 했다는 말은 율법에 나타난 진실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생명의 떡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해서 부활생명을 얻게하면 장사를 잘 한 것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바로 달란트 즉 하나님의 일을 장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장사를 해서 남겼다는 것은 부활생명의 예수의 제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20.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장 31-33절『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과 염소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 스스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는 미혹된 것이다. 미혹되면
각기 제 길로 가게된다. 미혹된 양과 염소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므로 세상의 흙속에 갇힌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와서, 그들을 데려간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양들을 의미한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염소가 된다. 그런데, 양은 왜 의인을 나타내고, 염소는 죄인을
나타내는가? 양은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을 만났다고 말한다. 염소도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소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25장
35-39절『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양들은
이렇게 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주릴 때 라는 말은 세상에 있는 자들을 영적으로 자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자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은 부활생명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에게 그 생명을 전한 것이다.『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라는 말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이다.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찾아서 부활생명을 주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래서 이제 그 일을 성도가 담당하는
것이다. 성도가 다른 신도들에게 부활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양은 영을
살리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일은 부활생명을 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22절에서『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평생 주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주님이『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 아들은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양이나 염소들은『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둘다 이렇게 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에게『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염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은 자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양은 영을 살리는 일을 했으며, 염소는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 쫒겨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영이 죽은 자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는 것이다. 사탄의 종이 된 자를 하나님 백성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던 영을 살려 주시는 분이시며, 부활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체 속에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일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형제들이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동일하게 하시는 자가 된다. 그렇지 않는 자는 영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죽어 있던 영을 살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전해주는 것이다. 양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빛(부활)을 영이 죽어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했지만, 염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염소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부활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하늘의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양과 염소는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양은 하늘의 부활생명이 있으며, 염소는 하늘의 부활생명이 없다. 양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피를 마시고(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살을 먹는 자(함께 부활하는 자)이고, 염소는 율법에 가로 막혀 생명을 얻지 못한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소는 다른 사람의 영을 살릴 수도 없고, 자신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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